[전영객잔]
켄 로치의 가장 슬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06-11-1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계급 모순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강건한 사회주의자인 켄 로치는 그러나 열광자라기보다 냉담자에 가깝다. 그는 이상에의 열광 뒤에 감춰진 현실의 차가움, 적과의 뜨거운 대치가 끝나고 찾아오는 내적 분열과 혼란과 공허의 냉혹한 난제를 잘 알고 있다. 내 생각에 그 차가움을 견디는 그의 이념이 영구혁명론의 트로츠키즘이다. 영국의 보수적 일간지 <더 타임스>는 켄 로치를 나치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든 레니 리펜슈탈에 비유했지만 그건 부당하다. 켄 로치는 증오의 정치학에 호소하거나 나/우리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켄 로치의 이상적 자아처럼 보이는 사회주의자 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싸우는 상대를 알기란 쉽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원하는 걸 알기는 어렵다.”

켄 로치의 영화는 부연설명이 필요할지언정 해석이 필요하진 않다. 그건 그가 원하는 것이다. 그는 모호성의 수사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가장 잘 말하는 방식은 이야기꾼이 되어 그의 영화를 구연(口演)하는 것이다. 영국의 폭정에 맞선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그런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가 이번엔 망설여진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관한 평과 감상문들을 읽어보았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이 영화를 평하면서 “왜 이 사람은 그토록 자기 조국을 혐오하는가?”라고 비난했지만, 한국의 평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만장일치의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다의적이거나 모호하지 않았던 켄 로치의 이 신작이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투쟁”에서부터 “인류 문명 전반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혹은 “거대한 운명의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던 두 형제의 엇갈린 운명을 담담하게 조명”, 여기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생각난다. 두 영화는 일단 이야기 구조가 같다. 비극적인 결말과 두 형제의 모습들이 비슷하다”라는 감상까지.

나는 이 영화가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낳을 만큼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텍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종종 비교되는 그의 걸작 <랜드 앤 프리덤>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결함이 있고 이 결함이 과장된 독해를 낳는 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인위적, 설명적으로 흐르는 이야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끝내 갈라서야 했던 데미안과 테디 형제를 중심으로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켄 로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분석적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의 활력과 이야기의 속도감을 유지하는 뛰어난 장인적 능력을 발휘해왔는데 이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소그룹의 움직임을 담는 미디엄-롱 숏에서의 탁월한 동선 연출과 감정 과잉을 차단하는 단호한 편집도 여전한 장점이다. 데미안 일행을 탈출시킨 고건이 마침내 죽는 전투신은, 그 많은 전쟁영화의 스펙터클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놀라운 박진감과 위엄 그리고 깊은 비애가 담겨 있다. 고건의 죽음을 담은 흔들리는 프레임의 가장자리에, 모자를 벗고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서 있는, 속머리가 다 빠진 늙은 아일랜드 병사의 피로와 슬픔에 젖은 옆모습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조사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구성에는 난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적 분노가 지배하는 이 이야기에 켄 로치는 계급적 관점을 주입하려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다. 아일랜드 공화군(IRA)이 몇개 지역을 장악한 뒤, 자치 정부의 재판이 열리는 장면에서 가난한 농민에게 500%의 이자를 강요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스위니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법정은 스위니에게 오히려 농민에게 돈을 갚으라고 판결한다. 영웅적인 전사 테디는 스위니를 옹호한다. 그가 무기 구입비를 대주기 때문이다. 데미안과 테디가 처음 대립하는 이 장면에서 수전노 같은 인상의 스위니라는 인물은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린다.

IRA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지방 토호와 맺는 관계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켄 로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이며, 트로츠키주의자에 동정적인 인물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이끌어가는 대립항도 전반의 민족에서 후반의 계급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이 형제이자 전우였던 데미안과 테디를 결국 갈라놓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계급 모순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묘사는 없다. 농민들의 사회주의적 자치에 관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놀라운 장면이 단단하게 엮여 있던 <랜드 앤 프리덤>과 다른 점이다.

영국 정부와의 평화협정이 조인된 뒤 이뤄지는 미사에서, 신부는 급진파의 협정 반대 움직임과 토지몰수 및 무상분배의 사회주의적 선동을 규탄한다. 하지만 계급 갈등의 전선은 어디서도 묘사되지 않는다. 영양실조 걸린 아이가 등장하는 장면도 너무 인위적으로 보인다. 계급적 각성이 강조되는 이 장면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면서 설명적으로 흐른다. 1916년 저항을 주도했다 처형당한 사회주의자 제임스 코널리를 추종한 단은 계급 논쟁을 위해 끌어들인 인물이지만 그의 대한 묘사는 빈약하다. 테디를 비롯한 급진주의자의 선택이 계급적 각성인지 아니면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발로인지 불투명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한 영화

반사회주의의 입장에 선 테디라는 인물은, 서투른 연기 탓인지 아니면 그의 정치가적 면모를 드러내려는 연출 의도 때문인지 불분명하지만,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켄 로치는 한 인터뷰에서 형과 동생의 어느 한쪽을 지지하기보다는 이 상반된 선택의 지독함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믿기 힘들 만큼 테디의 고뇌는 딱딱하게 묘사돼 있다. 동생을 처형해야 하는 대목에서 그가 슬퍼하는 대목은 가증스럽거나 안쓰러울 정도로 어색하다. 대신 이 모든 업보를 짊어지고 죽음을 맞는 데미안은, 켄 로치의 영화에서 가장 관습적인 의미에서 비극의 주인공에 가깝게 묘사된다.

단점은 아니라 해도, 회의주의자의 면모가 강한 주인공 데미안의 대사는 이 영화의 신파적 요소와 어울린다. 오랜 친구인 크리스를 배신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나서 그는 연인 시네이드에게 “나는 이제 선을 넘었어. 이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라고 울먹인다. 처형당하기 전날 그는 시네이드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이 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뛰어들게 됐지. 이젠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우린 참 이상한 존재야. 우리 자신에게조차 말이야.”

여기에 이르면 데미안은 민족주의 전사나 계급영웅보다 미친 역사가 빚은 비극적 운명의 희생자로 느껴진다. 실천적으로 동조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주의적 의제를 비극적 운명론이 가린 이 결말을 두고, 켄 로치가 퇴행했다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부당할 것이다. 그는 어떤 이슈를 다루든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런 생을 산 인물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켄 로치의 가장 뛰어난 영화는 아니지만 가장 슬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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