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그렇게까지 할 가치
2006-11-10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조국이란 게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배신자라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알던 친구를 죽여야 했던 데미안이 비통하게 내뱉는 한마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나오는 잊을 수 없는 대사다. 영화는 후일 데미안의 형이 데미안에게 총을 겨눌 때 관객이 마음속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조국이 정말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역사란 놈의 고약한 버릇은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걸 입증한다는 점이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기특한 미덕은 그걸 상영시간 2시간 안에 응축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역사 속의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켄 로치에게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그 계급투쟁은 어쩔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맞게 되는 비극이다.

탈주했던 이낙성씨가 잡혔다는 뉴스를 접했다. 엉뚱하지만 이낙성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대사를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라는 말. 이낙성은 절도와 강도로 몇 차례 감옥을 드나들었고 최종적으로 징역 3년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징역 3년을 마치고 보호감호 1년3개월 만에 탈주를 했는데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사회보호법이 폐지되어 함께 보호감호를 받던 사람들은 다 풀려났다. 4개월만 참았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광복절특사>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기어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이낙성은 길을 떠돌며 숨어다니는 삶을 살았다. 때론 중국집에서 때론 일용 노동자로 일하면서 심신은 피폐해졌고 앞니가 와장창 부러진 채 병원에 나타나 순순히 경찰의 수갑을 받았다. 아이러니는 그를 구금했던 법이 지금은 없다는 점이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만든 사회보호법은 범죄자가 자신의 죗값을 치른 다음에도 재범의 우려가 있다며 구금하는 이중처벌이기 때문에 2005년에 폐지됐다. 사회보호법이 더이상 지킬 가치가 없는 법이라고 결정난 마당에 그 법을 피해 달아난 사람을 대단한 범죄자처럼 여기는 것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경찰이 이낙성을 잡는 데 소홀했다며 질책하는 뉴스를 보면서 혹시 보도진은 강도나 살인보다 탈주가 더 나쁜 범죄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조국은 공동의 신념과 가치로 지탱된다. 그걸 지키기 위해 조국은 배신자를 가장 엄히 다스린다(살인은 용납하지만 배신은 용납하지 않는다. 형법상 덜한 형량을 받는다 해도 더 무서운 사회적 지탄이 쏟아진다). 갱조직이 배신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법이나 제도가 국가의 위신을 지키는 데 이바지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탈주는 형량이 높지 않다 해도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기에 사회적으로 중대한 범죄처럼 취급된다. 탈주범이 흉악한 짓을 저질러서 문제가 아니라 흉악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탈주 자체가 흉악범죄로 지탄받는 것이다. 이낙성이 이번에 받을 죄목은 탈주와 탈주할 때 교도관의 지갑과 휴대폰이 들어 있는 점퍼를 훔쳐 입었다는 절도, 두 가지라고 한다. 억세게 운 나쁜 사람, 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사태에 휘말린 악법의 희생양이라는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이낙성을 동정하는 여론에 대해 유사 스톡홀름 증후군 운운하며 범죄자에 대한 동정이 사회건강에 좋지 않다는 식의 기사를 보노라면 더욱더. 과연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건지, 생각해봤음 좋겠다.

P.S. 이번호에 취재기자 공채공고를 냈다. 경력, 신입 불문하고 뽑는 기회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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