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케인과 동년배라 해도, 숀 코너리나 알 파치노가 집사로 출연하는 모습을 떠올리기란 백조가 닭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상상이다. 주드 로가 40년 뒤에 집사로 출연하는 것은 또 어떤가. 단순히 역할의 경중을 떠나, 주인공 옆에서 묵묵히 그림자처럼 존재하면서도 없어서는 곤란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는 사람’의 분위기를, 숀 코너리나 알 파치노, 주드 로가 풍길 수 있을까. <프레스티지>에서 마술기술자로, <배트맨 리턴즈>에서 집사로, 이름보다는 인물의 역할로 기억되는 마이클 케인이지만, 그는 주드 로가 출연한 <알피>의 1966년 원작에서 알피로, 마크 월버그가 출연한 <이탈리안 잡>의 1969년 원작에서 찰리 크로커로 출연했던 배우다. 포효하는 연기 없이도, 나이를 숨기는 촬영술이 없이도 73살이라는 나이와 은근한 역할들로 다시 전성기를 맞은 마이클 케인의 비밀은 무엇일까.
“새벽 2시에 방영되는 TV영화에 출연했더니 사람들은 내가 죽은 줄 안다.” 마이클 케인은 80~90년대 부진했던 시기에 대해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제2의 전성기라고 일컬어지는 최근 그를 영화에서 본 사람은 주인공을 보좌하는 현명한 할아버지 정도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는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상대역이라기보다 주인공을 보조해주는 집사(<배트맨 비긴즈>)나 주인공을 그림자처럼 돕는 마술 기술자 겸 조력자(<프레스티지>) 같은 인물들로 주로 출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영화로 리메이크된 <알피>의 주드 로 역할 ‘알피’, <이탈리안 잡>의 마크 월버그 역할 ‘찰리 크로커’, <겟 카터>의 실베스터 스탤론 역할 ‘잭 카터’는 모두 그의 역할이었다. 지금 그가 일렬로 행진하는 버킹엄궁의 병사들처럼 똑 부러지는 영국 악센트를 구사하는 집사 역할로 뇌리에 선연히 남아 있을지라도 그는 흥행작을 여럿 낳은 스타였다. 73살이나 된데다 영국 여왕에게 기사 작위까지 받은 ‘마이클 케인 경’. 그가 <배트맨 비긴즈>와 <프레스티지>에서 연기했던 역할들은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고, 숨은 그림자 같아야 하는 집사치고는 존재감이 분명하며, 딱딱해 보이는 인상에 비해 사근사근하고, 주인공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나 주인공을 도와줄 뿐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인물들이다. 없으면 안 되는 역할이지만 없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것 같지 않은 역할들을 연기하면서 그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택의 여지없이 시작한 연기
2000년 기사 작위를 받은 마이클 케인은 숀 코너리, 로저 무어, 엘튼 존, 앤드루 로이드 웨버 등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친분이 두텁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계급 투쟁가’라고 부른다. 어시장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가정부였던 어머니 아래서 태어난 그는 여전히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는 영국에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계급은 영국에 암과 같은 존재다. 계급만큼 재능을 낭비하게 하는 것도 없다.” 드라마 스쿨에서 연기를 배운, 배우로서 공적인 경로를 거치지도 않았다. 드라마 스쿨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라디오는 아버지가 경마 중계를 듣는 데 쓰고 있었던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드라마 스쿨의 존재를 알기조차 힘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마이클 케인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스타’라는 부와 명성이 번쩍이는 단어와는 관계없는 선택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는 고개부터 젓는다.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싶었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면 어떻게든 됐겠지. 배우는 게이와도 같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에서다.” 하지만 16살에 학교를 그만두면서 바로 연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사에 잡무를 돕는 일자리를 구한 것이 시작이었다면 시작이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배우가 되고자 하는 희망은 잠시 접어야 했다(이후 영화 데뷔작인 <헬 인 코리아>(1956)를 찍을 때 그는 연기뿐 아니라 한국전 복무경험을 살려 여러 자문을 하기도 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뒤 그는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해, 카렐 차펙의 연극 <로봇>으로 배우 데뷔를 했다. 당시 마이클 케인의 예명은 마이클 스캇이었다. 에이전트한테서 영국연기자조합에 같은 이름의 배우가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런던 극장가인 레스터 스퀘어에서 다른 예명을 궁리하다가 한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케인호의 반란>을 보고 ‘마이클 케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농담이긴 하지만 “만일 다른 쪽 극장을 봤다면 지금쯤 ‘마이클 101마리 달마시안’이라고 불리고 있을지도”. 그의 무명기에 얽힌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1957년, 마이클 케인은 동료 배우가 쓴 일인극에 출연한 적이 있다. 데이비드 베이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친구가 쓴 첫 번째 연극 대본인 <방>이 그것이었는데, 친구는 각본가로서는 본명을 사용하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케인은 그제야 그 친구의 본명을 물었다. “헤럴드 핀터.” 2005년 노벨문학상을 탄 헤럴드 핀터 말이다.
히트작 <줄루>로 스타덤에 오르다
마이클 케인은 연극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고 있었지만 애초에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 영화가 계기였다. <케인호의 반란>이 상영 중이라는 간판을 보고 예명을 케인으로 바꾼 것 역시 그가 좋아하던 배우의 한 사람이 험프리 보가트였기 때문이다. 무대 연기와 영화 연기에 대한 차이점 역시 일찌감치 생각하고 있었다. “연극 무대를 볼 때 관객은 종이로 만든 나무와 세트를 예민하게 지각하고 있다. 일종의 가상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든 게 진짜여야 한다.” 그는 언제나 보는 사람이 그가 연기하는 배역이 실존인물인 것처럼 느끼도록 연기하고자 했다. “관객이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으면 했다. 마이클 케인이 아니라 관객 자신을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길거리에서 위대한 영화배우 취급을 당하는 일이 적었다. 그를 아는 사람 취급했기 때문이라는 게 케인의 해석이다.
그가 배우로서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64년 히트작 <줄루>부터였다. 계급문제에 부정적인 그가 공교롭게도 상류층인 곤빌 브롬헤드를 연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그는 오디션 과정에서 상류층 악센트를 써보라는 요구에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했지만 역을 따내는 데는 성공했고, 19세기 남아프리카 줄루족과 영국 군인간의 전투를 그린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좀더 큰 배역들을 따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60년대는 마이클 케인을 발견하고 또한 키워냈다. “계급이 모호한 시대인 동시에 계급적 자각 또한 더없이 분명했던, 시대정신으로 가득 찬” 이 시기에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35만파운드에 7년 전속 계약을 맺기도 했다. <줄루>가 개봉한 직후 식당에서 영국 영화제작자인 해리 샐츠먼을 만난 그는 렌 데이턴의 <입크레스 파일>에 출연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제임스 본드의 대척점에 선 스파이 역할을 연기한 <입크레스 파일>(1965)의 성공은 <알피>(1966)의 주인공 알피 캐스팅으로 이어진다.
천하의 바람둥이 알피부터 복장도착자 엘리어트 박사까지
영국에서는 이미 성공한 배우였지만 미국에서도 성공가도를 이어갈지의 여부는 마이클 케인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영국 억양을 미국 관객이 받아들일지도 걱정거리였다. <알피>는 대히트를 기록했고 그는 백만장자 영화배우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 알피를 남녀 불문한 관객의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콧대 높은 캐리 그랜트’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콧대 높고 어이없을 정도로 여자문제에 자신만만한 알피는 주드 로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었을 뿐 아니라 마이크 마이어스의 <오스틴 파워>에도 그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마이어스 자신이 마이클 케인의 <알피>를 오스틴 파워의 인물설정에 참고했다고 밝힌 것은 물론, 마이클 케인 자신이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2002)에서 오스틴 파워의 아버지로 출연해서 혈통(?)을 증명하기도 했다. 하루 두병의 보드카와 80개비의 담배는 아찔한 성공을 지탱하는 그만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알피>로 시작해 <이탈리안 잡>(1969)과 <겟 카터>(1971)에 이르는 성공은 그를 스타덤의 정점에 올려놓지만 그의 영화가 성공을 거두는 확률은 점점 예측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고향 런던의 날씨처럼 대부분 안개, 정도였다. 70년대 그의 성공작은 돈 시겔의 <블랙 윈드밀>(1974), 존 휴스턴의 <왕이 되려던 사나이>(1975), 리처드 애튼버러의 <머나먼 다리>(1977) 등으로 이어지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는 숀 코너리나 제임스 칸 다음의 위치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1980년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드 투 킬>에 이르면 알피의 그림자를 그에게서 찾기란 불가능하다. 복장도착자인 엘리어트 박사는 마이클 케인의 정중하고 예의바른 인상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적이고 예의바르며 안전해 보이는 인물을, 그는 공포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었다. 사악한 인상도, 포효하는 연기도 그의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의 악몽에나 나올법한 은밀한 뒷얼굴을 그가 드러내는 순간 그는 전기톱을 든 연쇄살인마보다 폭발적인 공포를 안겼다.
멋진 남자주인공에서 은퇴하다
81년부터 99년까지 그가 찍은 영화는 38편에 이르지만 이 시기의 그는 나이가 든, 한때 잘나갔던 영화배우 정도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차갑고 콧대 높아보이는 그의 이미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살짝 부은 듯 감긴 눈은 어렸을 적 눈병으로 얻은 것인데, 젊었을 때는 때로 섹시하고 때로 신비로웠던 인상이 점점 나이든 남자의 그것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한나와 그의 자매들>(1986)로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한 번 보면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폭발적인 연기를 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일단 위대한 역할들을 찾는다. 위대한 역이 오지 않으면 적당한 역할을 구한다. 적당한 역이 오지 않으면, 집세를 낼 수 있는 역을 구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당시 <죠스4> 촬영 때문에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그 사이 20여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했고 그중 몇곳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게 다였다.
인생의 중반 이후 누구나 기억할 만한 멋진 남자주인공 역할이 멀어진 시기에도 그는 머리를 붙잡고 고민에 빠지기보다는 그냥 웃어넘기는 쪽을 택했다. “나는 내가 은퇴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은퇴하고 나서 더 많은 영화를 하고 있는 셈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보기도 싫다. (웃음) 영화를 고를 때 나 나름대로의 엄격한 기준이 있다. 대사를 외우는 것도 싫고, 새벽부터 작업하는 것도 싫어하고, 집과 가족을 떠나서 촬영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것저것 고려한 뒤에도 내가 도저히 거부하지 못하는 제의가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제의가 더없이 매력적인 것이 되기도 했다. 라세 할스트롬의 <사이더 하우스>(1999)에서 그는 고아들을 정성껏 돌보는 동시에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여성들에게 낙태시술을 해주는 라치 박사를 연기해,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주인공을 돌보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그는 다시 캐스팅의 봇물을 맞는다.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것도 이 시기다. <콰이어트 아메리칸>(2002)은 그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되찾아준 작품이자 마이클 케인의 연기를 다시 보게 만든 영화다. 케인이 연기한 파울러는 베트남전 취재를 위해 베트남에 간 특파원으로, 아내와 새로운 베트남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며 전쟁의 화염에 휩쓸리는 인물이다. 크리스토퍼 놀란과의 인연은 <배트맨 비긴즈>(2005)로 시작해 <프레스티지>(2006)로 이어졌다.
보통 사람의 끝나지 않는 노래
매드니스가 부른 1984년 노래 <마이클 케인>에는 최근의 마이클 케인을 예견하는 듯한 구절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지 않아.” 바로 이어지는 가사는 마이클 케인이 직접 “내 이름은 마이클 케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름보다는 집사로, 누군가의 남편이나 주인공의 조력자로 기억되는, ‘아는 남자’ 혹은 보통 사람.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누구라도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천재적인 주인공 옆에서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신의 삶의 행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보통 사람으로.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간절히 목표로 했던 누구나 거울을 보면 마주볼 수 있는 인간이, 마이클 케인의 40년 넘는 연기경력이 이른 도달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