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식 감독이 말했다. “두 배우가 이미 멋지고 예뻐서 내가 별로 할 게 없고, 공짜로 가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지난 8월 영화 <그해 여름>의 촬영현장 공개 때 여기저기 났던 기사들 중에 실린 멘트다. 감독의 말은 아마도 이런 속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멜로영화 속의 이병헌과 수애, 같이 있기만 해도 말이 되고 그림이 되는 조합. 배우 이병헌과 멜로 장르의 궁합지수는 이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우리가 확인해왔던 바이고, 배우 수애와 멜로 장르의 궁합지수는 (<가족> <나의 결혼원정기>에서는 명징하지 않았지만) 모 브랜드 커피CF만 보더라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녹음해서 간직하고 싶은 나지막하고 편안한 목소리, 뇌리에서 곱씹게 되는 다정한 말투, 벽에 붙여두고 싶은 그윽한 눈빛에 있어서 이병헌과 수애는 서로 닮기까지 했다. 두 사람에 관해 부정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속성은 멜로영화 <그해 여름>이 개봉하면 가장 큰 무기로도 힘을 발휘할 것이다.
‘사랑하고 싶음’의 정서가 뚝뚝 묻어나는 연인을 서울의 한 식당에 불러들였더니 갈빛이 된 주위 잎새들마저 아련하게 보인다. <그해 여름>의 이야기는 짧은 사랑과 긴 추억에 관한 것이다. 농활차 서울서 내려온 대학생 석영과 마을 도서관 사서 정인 사이에 있었던 여름 한달의 열병 그리고 40년의 되새김. 식당의 바닥은 나무로 돼 있었다. 이병헌과 수애가 사진 촬영을 위해 장소를 옮길 때마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근사하게 퍼졌다. 진짜 러브스토리 따윈 벌어지지 않았지만 러브스토리의 정서는 충만했다. 그런 것에 시큰둥히 반응하고 의심하려는 마음이 야박하게 느껴질 만큼.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모습에서 멜로영화 일백편의 시나리오가 써지고 있다.
맑은 남자의 아련한 정서, 이병헌
“경험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고, 경험에 처했을 때의 자기 감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술에 취해서 자다가 일어나서 눈을 딱 떴는데 길거린 거야, 버스정류장이고. 일단 눈을 감아. 자는 척을 해야 되나? 어떡하지?” “나이가 들면 세월에 무뎌질 대로 무뎌지기도 하고 여유로워지기도 하고 그래서 젊었을 때와는 슬픔에 반응하는 것도 달라지게 되죠. 누가 죽었단 얘길 들어도 젊었을 땐 진짜야! 어떡해! 흐엉, 이러지만 나이가 들면 어? 어, 그래, 어….” 상황극을 보는 듯하다. 이야기의 예를 들 때마다 성의껏 연기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동그란 눈매가 생기를 띠고 어조가 변화무쌍해진다. 이병헌은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다. 어느 기사에선가 조근식 감독은, 어떻게 하면 30대 배우를 20대 인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이병헌의 감수성이 그 간극을 메웠다고 말했다.
20대 청춘의 자취를 간직한 남자와 순수하고 맑은 멜로물은 잘 어울린다. “<그해 여름>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정서는 향수, 애틋함, 그리움, 그런 것들이에요. 영화에서 그런 정서가 보여지는 게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요. 어렸을 적에 제일 좋았던 영화가 <시네마 천국>인데 감정적 충격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아련함의 정서. 아련함이란 정서는 정말 사람들 마음속에 오랫동안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잡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초 시나리오상에서는 철없고 냉소적으로만 묘사됐던 석영을 감독과 여러 날 상의해가며 “팔딱이고 생명력있는” 캐릭터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을 향한 호기심어린 눈빛, 이별 앞에서 드러낸 듯 감춘 안타까움의 표정. 사진기자 앞에서도 순식간에 만들어진 그런 것들이 석영의 일부가 되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과거이자 우리의 한때였던 시절을 거짓말처럼 그대로 꺼내 보인다. 그래서 이병헌은 아련한 멜로의 다른 이름이 된다.
사려깊은 여자의 진지함과 관용, 수애
수애가 등장한 모 화장품 광고는 그 자체로 완벽한 비주얼 메시지다. 한자로 된 우아한 제품명과 한국화를 닮은 수애의 얼굴이 정확한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은 수애를 단아하다, 기품있다, 부드럽다, 청순하다, 라고 묘사한다. “그래서 동영상 인터뷰는 힘들어요. 영화 속에서 터프했고 악바리였고 덤벙댔고 하는 면보다는 인터뷰할 때 부끄러움타고 수줍어하는 모습만 기억에 남나봐요. 그렇다고 인터뷰할 때 정은(<가족>)이나 라라(<나의 결혼원정기>)나 정인이가 되어서 할 순 없잖아요. (상기되어) 이번에 한번 해봤어요. 그런 편견이 싫어서 밝고 씩씩하게 정인이처럼 연기했더니, 주위에서 전화왔어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너 같지 않아.”
“조근식 감독님은 배우를 편안하게 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조금 다르게 해볼까? 그러면 저는 여러 가지를 해봤죠.” 구체적 설명도 없는 ‘조금 다르게’라는 막연한 디렉션. 그것을 무한한 자유로 받아들였던 수애는 “작품을 많이 해서 다른 이미지를 보여드려야지…” 하고 혼잣말을 했다. “고작 세편했을 뿐”이란 말을 몇 차례 반복하던 그에게서 변화무쌍함에 대한 갈망이 전해졌다.
몇몇 기사에 났던 것처럼 수애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뱄다. “학생 때도 그랬어요. 그래서 공부는 못했어요. (웃음) 지각한 적은 없지만, 밤새고 공부를 안 해서. (웃음) 아무튼 늦진 않았어요, 약속 같은 건. 엄마가 꼭 5분 전에 나가라고 재촉을 해요.” 먼저 나가서 늘 기다렸다고 한다. 수애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지,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단아한 사람이라기보다 엄격한 사람이다. 어미마다 똑, 똑, 끊어내는 말투에는 신중함과 정확함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진지함과 관용을 갖췄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대범하고 젠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큰 손을 가진 수애는, 그래서 깊은 사랑의 멜로드라마를 떠오르게 한다.
그림 속 두 배우의 대화
이병헌: 첫인상이라…. 너는 내 첫인상이 어땠냐.
수애: 첫인상…? 으음…. 너무 어려웠어요. 너무 어려워서 석영으로만 대했어요.
이병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수애: 왜 그랬을까….
이병헌: 얘기하다보면 이렇게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생겨. 지금도 나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궁금해하는데, 답을 잘 안 해주잖아.
수애: (생각하다가) 밝게 흐트러진 것 같다가도, 어느샌가 보면 무뚝뚝해져 있고. 아무래도 좀 정확하잖아요, 오빠가.
이병헌: 수애의 가장 좋은 점. 평소에 말없고 조용한 느낌과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뿜는 에너지가 되게 다르다는 거. 일반인보다 내성적이고 쑥스러움이 많은데 카메라 앞에서 보여지는 면을 보면 아, 이 친구 배우구나, 싶어.
수애: 나는 오빠 없을 때 얘기하면 안 돼요? 없을 때 얘기할게요. 바로 옆에 있으니까 진심이 안 나오고, 빨리 무마하려고 돌려서 얘기하게 될 것 같아요. 우리가 감수성은 닮은 것 같긴 해요. 성격 면에서는 없어요.
이병헌: 간혹 보면 도전심리가 있어. 모험 좋아하고 뭔가 부딪혀보는 거 좋아하고. 운동도 웨이크보드, 수상스키 이런 거 좋아하고. 나도 그런 게 있는데. 누군가가 새로운 걸 제시했을 때 크게 겁먹지 않는 모험심. 자기 걸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아.
수애: (고개만 끄덕끄덕)
(이병헌이 가고 나서)
오빠는, 오빠 자체가 매력이에요. 지금, 서른여섯살의 배우. 당당함. 배려. 그런 게 멋져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