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류민(문근영)은 어마어마한 부자지만 기댈 곳이 없다. 잘나가는 호스트 줄리앙(김주혁)에겐 빚만 넘친다. 줄리앙은 친오빠라고 류민을 속여 돈을 뜯어내려 한다. 둘은 세상에 기대하는 것 없는 척 애써 냉소적이다.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감독 이철하·9일 개봉)는 멜로의 공식대로 간다. 거칠지만 순정이 있는 남자와 비련의 여인이 만났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 전형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건 두 주연의 몫으로 남았다. 지난 4일 두 배우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언젠간 팜므파탈도 어울릴 것”
상처많은 시각장애인 역 문근영
변화를 꿈꾸는 20살=‘국민 여동생’이란 수식어는 문근영의 버팀목이자 덫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순수의 세계를 지키는 피터팬으로 남길 바랄지 모르지만 그는 이 안전하고 갑갑한 수식어 밖으로 나설 참이다. “틀에 억지로 맞춰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부담이 됐어요. 이젠 솔직히 그러거나 말거나라고 생각해요. 눈에 띄는 게 싫어서 예전처럼 촬영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거나 하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절 밝고 귀엽게만 보는데 다른 것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문근영은 생경한 변신을 꾀하진 않았다. 줄리앙과 남매 비슷한 관계를 맺는 류민은 여동생의 이미지에 걸치고 있다. 연변 처녀 장채린(〈댄서의 순정〉)이나 여고생 서보은(〈어린 신부〉)에 비하면 상처로 뒤틀리고 그늘이 깊지만 드라마 〈가을동화〉 〈명성왕후〉에서 보여줬던 처연한 눈망울은 닮았다. “나이가 들면 제 안에 다른 게 서서히 생기겠죠. 언젠가 (매혹적이면서 악한 면도 있는) 팜므파탈도 어울릴 때가 올 거예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영화 〈길 위에서〉에 등장한 뒤 쭉 그는 드물게 안티팬이 없는 스타였다. 〈댄서의 순정〉이 관객 220만명, 〈어린 신부〉가 320만명을 불러들인 힘의 8할은 그의 말갛게 투명한 매력이었다. “그 사랑을 유지하려니 연기하는 게 한동안 힘겨웠어요.” 그는 지난해 말 대중의 사랑이 얼마나 죽 끓듯 변하는지 경험했다. 성균관대 인문계열에 자기추천 전형으로 수시합격한 것을 두고 누리꾼들은 “연예인이라 특혜를 본 거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많이 아팠지만 치유법을 터득했어요. 모두에게 사랑받을 순 없잖아요. 공자도 예수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라고 다르겠어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요.” 그는 시선의 포위망을 뚫고 평범한 20살을 누리려 애쓰는 중이다. “친구들이랑 밥도 같이 먹고 수업도 듣고 술도 마셔요. 배우고 싶은 게 많고 이곳저곳 여행도 하고 싶어요.”
“대사없이도 끌고가는 배우됐으면”
냉소적인 호스트 분한 김주혁
깊이를 꿈꾸는 35살=진짜 꽃미남이 맡았거나 연기가 조금만 과장됐더라도 줄리앙은 무척 느끼해졌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끝까지 지키는 멜로 영화의 단골 캐릭터가 그래도 독특한 존재감을 갖는 건 김주혁 덕이다. 그는 실제로 줄리앙처럼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호스트를 만나 비결도 물었다. “뾰족한 수는 이야기 안해주던데요.”
완벽한 외모를 갖춘 것도, 강렬한 특성을 드러내는 배우도 아닌 그는 여러 이미지를 유연하게 넘나들었다. 얄밉고 차가운 과학도(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동네 일이라면 다 끼어드는 실속 없는 청년(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까지. 능청스러운 작업남(〈싱글즈〉)도 꽉 막힌 숙맥(〈광식이 동생 광태〉)도 그에겐 무리 없이 어울리는 편이다. “다들 저와 조금씩 닮았어요. 줄리앙은 냉소적인 표현이 비슷해요. 제가 원래 내성적이라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안녕히 주무세요’ 같은 평범한 말도 잘 못해요. 일부러 장난 치듯 까불며 넘어가 버리죠.” 그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까닭도 “보통 때는 도저히 못하는 표현도 연기로는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내처 일년 동안 연극에 빠졌다. 연봉 5만원 받고 무대에 섰던 추억이 또렷하다. “돌아보면 땀 흘리고 행복했어요. 공연 끝난 뒤 박수 받는 희열은 영화 찍을 때와는 달라요. 지금은 더 게을러져버린 듯해요.” 1998년 에스비에스 공채 탤런트로 뽑혀 경제적으로 고생스러운 시절은 면했다. 영화 〈세이예스〉 〈YMCA야구단〉,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등을 거치며 관객의 뇌리에 조금씩 자취를 남겨갔다.
역할 모델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영화 〈철도원〉에서 다카쿠라 겐의 연기를 기억한다. “그냥 깃발을 들었다 내리는 것만으로 관객을 압도해요. 저도 나중에 대사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극을 끌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