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에서 마주친 이영훈과 이한은 그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이었다. 매니저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에 나타난 이영훈은 (이송희일 감독이 장난으로 부르는 예명처럼) ‘양아치’ 같았고, 매니저를 대동하고 끊임없이 키득거리며 장난에 몰두하던 이한은 또 하나의 철없는 탤런트 같았다. 이송희일 감독에게 솔직하게 귓속말로 물었다. “수민과 재민. 잘 모르겠는데요.” 수다쟁이 이송희일 감독이 웃기만 했다.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그토록 극성맞게 굴었다는 후문이 들리더니만 이상하게도 말을 아꼈다.
<후회하지 않아>의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이송희일 감독의 조용한 웃음이 떠올랐다. 현장에서 목도한 젊고 잘생긴 남자들은 스크린 속에 없었다. 대신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쉽지 않았을 연기를 가슴을 바쳐서 해낸 젊은 배우들이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바꾸어놓았을까. 인터뷰를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선 두 남자는 조근조근 고백했다. <후회하지 않아>를 거치면서 많은 것이 변했노라고. 부산영화제와 시사회에 참가하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생각하게 됐노라고. 이영훈과 이한에게 <후회하지 않아>는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격렬한 청춘의 통과제의였다.
캐릭터에 자신을 완전히 던지다 _ 이영훈
사진 한장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영훈이 이송희일 감독을 만난 건 지난 2001년, 매니지먼트 계열에서 일하던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사진 한장 덕이었다. 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캐스팅된 이영훈은 고등학생과 유부녀의 사랑을 다룬 단편 <굿 로맨스>를 찍으면서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를 배웠다. 연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 다짐한 그는 연극 공연도 했고, 드라마와 영화의 보조 출연도 묵묵히 해냈다. 하지만 군대를 갔다오니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밑에서 장사도 했고, 정육점에서 고기도 썰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연기를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다시 부른 건 “형이자 매니저 같은” 이송희일 감독이었다.
이영훈은 <후회하지 않아>의 시나리오를 대하곤 가슴이 먹먹해졌노라 고백한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웠던 건 남자와의 정사신이 아니라 <후회하지 않아>가 장편영화라는 사실이었다. “2년 넘게 전혀 연기라곤 못해봤는데 주인공을 시켜서 부담스러웠다. 장편영화인데 잘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처음부터 이영훈을 수민 역으로 내정했던 감독의 믿음처럼, 이영훈은 “계속해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라고 주문을 외우며” 수민에게 빠져들었다. 이송희일 감독이 그를 “캐릭터에 자신을 완전히 던져버리는 배우”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물론 자신을 온전히 던져버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영훈은 촬영이 끝나고나서 우울증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수민이라는 인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데만 석달 정도 걸렸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장편을 하나 찍은 배우가 됐고, 우울증도 벗었으며, 마침내 어른이 됐다. 영화배우 이영훈에게 <후회하지 않아>는 후회없는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과감한 선택으로 편견을 벗어내다 _ 이한
의외였다. 이송희일 감독이 첫 장편의 주인공 중 한명으로 캐스팅했다는 이한은, <굳세어라 금순아>에 출연했던 ‘탤런트’였기 때문이다. 저예산 퀴어영화, 시나리오를 본 대부분의 배우들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는 <후회하지 않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기의 기회를 얻기 위해 MBC 공채에 응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끈질긴 편견을 거둘 수 있었다.
편견은 그렇게 무섭다. <후회하지 않아>의 시나리오를 접하기 전까지 만난 동성애자는 공채 시절 특강 강사였던 홍석천 선배가 전부였던 그에게 게이, 게이들의 사랑은 거대한 물음표였다. 꺼리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선배님들이 그러셨다. 배우로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재민이 되었다. 안락한 생활과 솔직한 욕망 사이에서 이뤄지는 재민의 선택은 온전히 그의 것이기도 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재민과 수민의 첫 만남. 뜨거운 눈빛 속에 수천 마디 속삭임을 담는 장면은 비교적 초반부에 촬영했던 분량. 한눈에 반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지 않냐는 이한의 물음에 이송희일 감독은 “그럴 수 있다”는 말로만 일관했다. 이제는 그것이, 소수자이기에 서로를 알아보는 더듬이가 더욱 민감하기 때문임을 안다.
개봉을 앞둔 지금,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동성애라는 소재를 향한 호기심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기본적으로 멜로영화다.” 야릇한 관심 속에 진심이 묻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당연한 우려. 어둑한 카페에서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의 먹먹한 감정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 그의 소박한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