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을 탐미하라!
2006-11-22
글 : 홍성남 (평론가)
11월28일부터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마르셀 카르네 & 쥘리앙 뒤비비에 회고전

프랑스의 영화사가 장 피에르 장콜라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시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범주 아래 속할 영화들은 1930년대의 프랑스영화라는 거대한 빙산의 드러난 일부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주변부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운명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의 염세적인 이야기를 낭만적인 우수로 가득한 비주얼 위에 그려낸 그 영화들이,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과 매혹을 새겨놓았고 그럼으로써 그만의 특별한 존재감을 내세우게 되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영화의 그 경향에 기여한 감독들로는 마르셀 카르네, 쥘리앙 뒤비비에, 장 그레미용, 피에르 슈날, 자크 페데 등이 주로 거론되는데, 그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두 감독의 작품들을 통해 프랑스 영화사의 중요한 경향과 자취를 돌아보는 자리가 시네마테크 부산(11월28일부터 12월14일까지)에서 마련된다.

<새벽>

시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아무래도 ‘시적 리얼리즘의 얼굴’이라 불리기도 했던 프랑스영화의 스타 장 가뱅부터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과 관련해 그에게 안개 낀 거리를 배회하는 탈영병 장(<안개 낀 부두>, 1938)이나 희망이 사라진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프랑수아(<새벽>, 1939)처럼 잊을 수 없는 영화 속 캐릭터를 만들어준 마르셀 카르네(1909∼96)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카르네는 시적 리얼리즘의 모범적 실례를 보여준 영화감독이었다. 앞에 거론한 두 작품과 <북호텔>(1938) 같은 영화들은, 염세주의의 짙은 공기가 정교하게 구축된 사회적 환경과 만나 그만의 독특한 영화적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며 그래서 그 시대와 어떻게든 공명하는 경우를 예시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데에는 카르네 주위의 협력자들의 공이 컸다는 것은 자주 지적되곤 하는 점이다.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위트와 서정성과 풍자가 함께 어울리는 대사, 무대감독 알렉상드르 트로뇌느의 정교한 세공 솜씨, 모리스 조베르의 낭만적인 음악이 빠진 카르네 영화의 매력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영화제작이란 집단적인 창조과정에 연루되었던 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그가 앞서 말한 협력자들로부터 아름다운 화음을 끌어내는 지휘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종종 믿을 수 없으리 만치 실망스런 결과를 보여주곤 했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리처드 라우드의 지적대로 그의 전후 영화들은, 심하게 이야기해, 전쟁 이전의 뛰어난 영화들과 달리 차라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게 나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르네는 영화평론가들에게 곤란한 평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시적 리얼리즘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이번에도 장 가뱅이 희망을 떠나 보내는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로 나오는 <망향>(1937)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만든 쥘리앙 뒤비비에 역시 카르네와 함께 프랑스영화 고전기를 풍미했던 영화감독이었다. <망향>의 예를 들면서 사람들은 그의 특징적인 주제란 바로 고립된 개인들이 겪는 비극적인 고난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영화적 절충주의자인 그는 어느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주제를 그에 걸맞은 다양한 틀 안에 담아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작가’라기보다는 성실한 장인 감독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화들 속에서 거의 매번 고르게 공간에 대한 정확한 감각과 심리를 다루는 말쑥한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화면에 그만의 창의성을 불어넣지는 못했다. 뒤비비에가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받아들인 자로서 ‘생존’을 오래 이어가긴 했으면서도 (특히 그보다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거장 - 마르셀 카르네 & 쥘리앙 뒤비비에 특별전’은 프랑스 영화사에 빛나는 영광만이 아니라 그 이면도 볼 수 있게 하는 입체적인 자리가 될 것 같다.

이상한 드라마 Drole de drame
감독 마르셀 카르네/ 출연 미셸 시몽, 프랑수아 로제/ 1937년/ 흑백/ 94분

마르셀 카르네의 주요한 파트너로 잘 알려진 자크 프레베르는 카르네와 영화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유쾌하고 파괴적이면서도 가치전복적인 연극활동에 몸을 담았는데, 카르네의 이 두 번째 영화는 프레베르의 그런 면이 스크린에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베스트셀러인 범죄 서적을 은밀히 쓰고 있기도 한 식물학자가 아내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펼쳐지는 어수선한 이야기에는 쾌활함과 괴팍스러움, 그리고 부조리함이 한데 섞인 묘한 공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 같은 즐겁게 무정부주의적인 태도 탓에 영화는 개봉 당시 실패를 겪었지만 그래서 지금 보면 카르네의 영화 가운데 가장 낡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안개 낀 부두 Le Quai des brumes
감독 마르셀 카르네/ 출연 장 가뱅, 미셸 모르강/ 1938년/ 흑백/ 90분

2차대전 전까지 프랑스 영화사에서 시적 리얼리즘이 중요한 경향으로 두드러지는 데 촉매 같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가 <안개 낀 부두>이다. 영화는 다른 세상을 향한 통로가 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세상의 끝일 수밖에 없는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탈영병 장과 후견인에게 고통받는 어린 넬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내 실패로 끝날 사랑 이야기를 어두우면서 서정적인 톤으로 들려준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는 “전체 영화를 감싸는 절망의 안개”에 감탄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즉 그 주제가 비도덕적이고 분위기는 패배주의적이라는 점 때문에 다른 많은 이들은 이 영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개 낀 부두>를 두고 누군가는 파시스트적인 영화라고 했고 심지어는 프랑스의 패배에 공헌한 영화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 같은 격한 반응이야말로 영화의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의 설득력과 매력에 대한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새벽 Le Jour se leve
감독 마르셀 카르네/ 출연 장 가뱅, 아를레티/ 1939년/ 흑백/ 93분

영화는 발랑탱이란 남자를 쏘고는 경찰에 포위된 프랑수아가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 같은 순환 구조를 통해 인물들에게 닥칠 운명이란 이미 물리칠 수 없는 힘으로 제시된다. 그처럼 운명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삶의 조건이건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결함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영웅의 비극을 그린 <새벽>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이 거둔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를 두고 앙드레 바쟁은 영화사상 가장 성공적인 비극적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쓰기도 했다. 그런데 카르네의 이 걸작은 RKO에서 리메이크한 <오랜 밤>(1946) 때문에 프린트가 전부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
감독 마르셀 카르네/ 출연 장 루이 바로, 아를레티/ 1945년/ 흑백/ 190분

카르네의 비판자들은 그를 두고 ‘도피주의자’라고 비난하는데, 그런 명칭이 적어도 <인생유전>에서만큼은 악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독일 점령기 동안에 마치 자신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려는 연합군 포로인 양 만들어진 ‘도피 영화’, 그럼으로써 프랑스는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리려 하는 영화인 것이다. 19세기 연극계를 배경으로 여러 사람이 얽힌 사랑과 예술 이야기를 다루는 <인생유전>은 카르네의 장점이 최대한 부각된다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한 영화다. 배우와 연극에 대한 애정과 회고의 정서 같은 카르네의 특성이 여기에서 최대치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라이벌로 삼는 이 프랑스적인 영화는 당대의 영화이면서 프랑스의 영화로 꼽힌다.

망향 Pepe le Moko
감독 쥘리앙 뒤비비에/ 출연 장 가뱅, 미레유 발랭/ 1937년/ 흑백/ 94분

경찰에 수배 중인 대도(大盜) 페페에게 미궁 같은 알제리의 카스바라는 지역은 안전한 은신처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곳은 그의 존재를 외부와 단절시켜놓는 감옥과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망향>은 그처럼 안전하게 갇혀 있어야 하는 존재인 페페가 갖고 있는 고향 혹은 잃어버린 꿈을 향한 처절한 동경에 대한 영화다. 프랑스적인 멜랑콜리와 낭만주의가 잘 살아 있는 영화 가운데 하나인 <망향>에서 주제는 페페의 갈망이 구체화되고 또 결국 꺾이고야 마는 후반부에서 가시화된다. 그때 드러나는 쥘리앙 뒤비비에의 섬세한 연출력과 장 가뱅의 그 자체로 표현이 되는 얼굴은, <망향>을 관객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무도회의 수첩 Un Carnet de bal
감독 쥘리앙 뒤비비에/ 출연 마리 벨/ 1937년/ 흑백/ 144분

뒤비비에의 성공작이며 대표작에 속하는 <무도회의 수첩>은 관객에게 그가 인생에 대한 씁쓸한 시각을 매력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영화감독임을, 그리고 특히 멜로드라마에 능란한 감독임을 알려준다. 영화는 젊은 미망인인 크리스틴이 첫 번째 무도회 때 함께 춤추었던 남자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낙태의가 되어 있고 또 누군가는 갱 두목이 되어 있다. 영화는 이처럼 여러 캐릭터들에 대한 출중한 스케치를 펼쳐내며 세월이 흐른다는 것, 그로 인한 환멸을 이야기한다. 뒤비비에는 나중에 미국에서 멀 오베론을 주연으로 기용한 리메이크작 <리디아>(1941)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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