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을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삼곤 하는 지금의 관객이 고전적 할리우드영화를 다소 싱겁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고전적 할리우드 시기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묘한 매력은 바로 그 밋밋한 듯 보이는 스타일에서 발견되곤 한다. 그들 영화의 스타일은 마치 레몬으로 쓴 편지와 같아서,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다가도 그 밑에 약한 불이라도 쐬어주면 그 문체와 의미가 선명하게 솟아오르는 쾌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회고전이 열렸던 ‘오토 플레밍거’나 오는 11월24일(금)부터 30일(목)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특별전의 주인공인 조셉 맨케비츠는 겉으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을 영화적 미덕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영화 세계를 구축한 이들이다.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출생한 맨케비츠가 영화에 눈을 뜬 것은 독일 우파(UFA) 영화사에서 일하면서이다. 이후 할리우드로 돌아온 그는 시나리오작가로서 먼저 인정을 받았고, 1946년 <드래곤윅>으로 감독 데뷔한다. 불과 3년 뒤 그는 <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1949)로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첫 감독상을 수상한 데 이어, 바로 다음해 발표한 그의 대표작인 <이브의 모든 것>(1950)으로 2년 연속 감독상을 수상한다.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은 이러한 정점을 전후로 해서 연출했던 다섯 작품과 그의 마지막 연출작인 <발자국>(1972) 등 총 6편이 상영된다.
<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와 <이브의 모든 것>은 시나리오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던 감독답게 현재와 과거를 결합하는 플래시백 구조를 한층 발전시킨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인 애디 로스의 보이스 오버를 매개로 해 세 부인이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구조로 직조되었다면, <이브의 모든 것>은 다양한 등장인물의 보이스 오버를 통해 이브의 삶을 다층적으로 재구성해나간다.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불러도 무방한 <이브의 모든 것>은 화려한 연극 무대의 이면에 숨겨진 욕망의 적나라한 실체를 들춰나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압권이다. <이브의 모든 것>은 이후 할리우드로 무대를 바꾸고 멜로드라마를 좀더 강화한 <맨발의 콘테샤>(1954, 미상영작)와 화려한 외양 뒤에 감추어진 추악한 진실을 폭로하는 맨케비츠의 또 다른 걸작인 <지난 여름 갑자기>(1959, 미상영작)를 예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맨케비츠는 원작을 영화적으로 각색하는 능력에서는 탁월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맨케비츠가 과소평가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원작에 의존한 것이 사실이고,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가 지적이면서도 연극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맨케비츠의 작품들을 ‘연극을 촬영한 영화’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멜로드라마의 양식에 담긴 ‘망각과 되살아남’에 대한 영화인 <유령과 뮤어부인>(1947)에서 유령인 그렉 선장(렉시 해리슨)이 루시 무어(존 티어니)에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일상적 현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몽환적인 판타지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화면 연출은 그의 ‘영화적’ 능력을 확인해주는 대표적인 장면일 것이다.
이들 작품 외에도 셰익스피어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무엇보다 말론 브랜도의 매력으로 넘쳐나는 <줄리어스 시저>(1953), 매카시즘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진 <말 많은 세상>(1951), 맨케비츠의 마지막 영화로 로렌스 올리비에와 마이클 케인의 연기가 돋보이는 <발자국>이 함께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