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러셀 크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섹스 & 시티>에서 네 여자가 성적 판타지를 채우고 싶은 섹시남으로 러셀 크로를 꼽았을 때 “언니들, 그러니까 맞고 사는 여자 보고 맞을 짓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란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잘해봐야 <LA 컨피덴셜>에서 보여준 약간의 아이 같음이나 <글래디에이터>의 우직한 용기, <신데렐라>에서의 묵묵한 부성애 정도가 러셀 크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마디로 너무 무식하고 깡패같이 보인다는 말씀이다. 사실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그가 <어느 멋진 순간>이라는 ‘로맨틱코미디’에 ‘펀드매니저’로 등장한다는 기사를 보고 ‘지나가던 개나 웃을 만한 영화군’이라고 생각했다(이런 영화를 돈 주고 봐야 하는게 ‘투덜양’의 비애라고나 할까). 사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이런 예상을 크게 넘어가지 않았다. 와인잔을 앞에 두고 어린 시절 주인공의 삼촌이 주저리주저리 인생의 진실을 논하는 첫 장면은 한없이 느끼하더니 다음 장면에서 어디서 장작 패다가 면도도 못하고 황급히 들어온 것 같은 러셀 크로가 증권회사 직원들에게 타이밍 어쩌고 하면서 똑똑한 척을 해댈 때는 ‘꼬라지하고는~’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봐줄 만한 영화로 바뀌었다. 물론 느끼하고 재수없는 컨셉이 바뀐 건 아닌데다 와인 찬양이라면 <사이드웨이>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수가 떨어진다. 하지만 유럽의 낭만을 논할 때 동급최강으로 자주 언급되는 프로방스의 동네를 기웃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러셀 크로의 조카가 말한 것처럼 삼각형, 사각형으로 각진 오래된 집들과 포도밭을 멀리서 볼 때는 세잔의 그림 같은 우아함이 있고, 러셀 크로가 돌아다니는 읍내와 낡은 테이블을 클로즈업할 때는 부드러운 햇빛에 온몸이 녹아버릴 듯 달콤했다. 심지어 영화를 보다가 내가 만약 500만달러짜리 이 집과 포도밭을 유산으로 받게 된다면 팔지 말고 별장으로 쓸까? 아니면 아예 그냥 눌러앉을까, 아냐 그럼 너무 지겹겠지, 그냥 별장으로 쓰는 게 낫겠어라는 꽤 진지하고 어처구니없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 멋진 순간>에서 주인공의 로맨스는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보인다. 바꿔 말하면 둘의 감정과 행동 변화를 면밀하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건데 그게 희한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미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좋은 데서 빈둥거리면 뭐, 예쁜 여자랑 연애도 할 수 있지 않겠어? 하는 말투다. 그렇게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러셀 크로가 여자를 향해 순한 눈웃음을 보낼 때 마침내 나도 “맞고 살더라도 당신이랑 살래”라고 외치는 여자들의 행렬에 동참하게 됐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이 프로방스에서 놀면서 돈도 좀 벌어보자는 불순한 사심으로 만든 것같다. 그런데 그 사심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 이름값이란 이래서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