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40대, 쇼는 시작된다, <트랜스아메리카> 배우 펠리시티 허프먼
2006-11-30
글 : 박혜명

인생은 때로 한방이다. 적어도 할리우드 여배우 펠리시티 허프먼의 인생은 그 한방으로 달라졌다. 그녀의 한방은 2004년 방송을 시작해 이듬해까지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2005년 에미상 주요 부문을 휩쓸었던 TV시리즈 <위기의 주부들>이었다. <위기의 주부들>에서 허프먼이 맡았던 역은 광고계에서 날리던 커리어를 접고 4명의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 생활에 허덕이는 리네트 스카보. 네명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위기에 빠져 있고 가장 평범한 일상에 속해 있으면서 날마다 신경증에 시달리는 리네트 역으로 펠리시티 허프먼은 에미상 여우주연상과 골든글로브 TV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펠리시티 허프먼은 1962년생, 올해 마흔네살이다. 열여섯살 때부터 TV연기를 시작해 브로드웨이와 브라운관만 오가다시피 했던 그녀는 마흔여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다가 이때 처음으로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연기상을 탔다. 배우로서 허프먼의 인생은 오랫동안 우울한 장마기였다. 치르는 오디션에서 매번 낙방한 까닭은 예쁘지 않아서였다. 오디션을 보고 나면 캐스팅 에이전트들이 하는 말이 이랬다. “좋은데요, 예쁘지 않으시잖아요.” 허프먼은 그 솔직함도 고마웠다고 한다. “내가 연기를 못해서 떨어진 거라고 생각할까봐 해준 얘기였던 거다. 그들도 사악한 의도를 부린 건 아니었다. 나도 내가 예쁘지 않다는 걸 안다. 나는 새처럼 생겼다. 입술도 얇고 얼굴은 길고 다리는 녹은 양초마냥 못생겼다.”

2005년이 펠리시티 허프먼의 해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러나 <위기의 주부들> 때문만은 아니다. 허프먼에게 이슈를 가져다준 또 하나의 작품은 던컨 터커라는 신인감독의 데뷔작 <트랜스아메리카>다. <트랜스아메리카>는 완전한 여자가 되고 싶은 나이 든 트랜스젠더 브리 오스본의 로드무비다. 성전환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시작된 이 여행의 동반자는 ‘그녀’가 ‘그’였을 때 실수로 만들어버린 아들 토비. 열일곱살의 비행 청소년이 되어 나타난 아들에게 브리는 자신이 교회에서 나온 사회봉사자라 거짓말한다. <위기의 주부들>이 화사한 비주얼과 매력적인 여배우들 덕에 허프먼의 개성 또한 과장할 구석이 많았다면 저예산 인디물 <트랜스아메리카>는 그녀가 여배우로서 어필할 만한 구석까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두피가 훤히 드러나는 거친 머릿결의 가발, 떡칠한 화장, 유행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옷이 필요했고 30대-40대-50대로 점차 나이를 먹어가는 트랜스젠더들 특유의 여성적 행동들과 습관을 익혀야 했다.

가장 어려운 건 목소리였다. 호르몬 주사로도 바꾸지 못한다는 그 목소리를 흉내내기 위해 허프먼은 본래 가진 음정에서 4옥타브를 낮추고 그 저음에서 다시 여성의 고음으로 높아지려는 남자의 목소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한마디로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를 연기해야 하는 여자였다. 그래도 내가 애초에 예쁜 사람은 아니어서 예뻐 보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걱정만큼은 덜었다. <위기의 주부들>의 리네트는 정말 예쁘게 꾸민 축에 속한다.” 애틀랜틱 시어터 컴퍼니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 지난 1997년에 결혼한 남편 윌리엄 H. 메이시가 촬영기간 중 안부 전화를 걸어오면 허프먼은 쉽사리 자기 목소리를 본래대로 돌려놓지 못해서 애를 먹었다. 아내가 트랜스젠더가 되어 6주간 미국 전역을 도는 동안 집안일을 돌본 메이시는 “난 브리랑 통화하고 싶지 않아. 펠리카(펠리시티의 애칭)와 통화하고 싶어”라며 매번 끔찍해했다고도 한다. 현장에 놀러온 5살, 3살배기 두딸이 엄마를 몰라보고 운 에피소드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미용사가 될까 했었다. LA 마리넬로 미용학교에 입학원서까지 넣었었다. <트랜스아메리카>의 시나리오를 건네받았을 때 허프먼은 <위기의 주부들>의 파일럿 프로그램 리딩 리허설 중이었다. “내가 찍은 파일럿이 방송 한번 못 타보고 사장되는 걸 수도 없이 봐와서 그때도 별 기대는 갖지 않았었다.” 막막함과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고 한다. 감독에게 “그냥 남자배우를 구해보세요”라고 말하기도 했고, 브리가 성기를 드러내고 오줌을 누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엔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어서 트레일러 안에 처박혀 울기도 했다. 촬영을 마치고 LA에 돌아왔을 때 <위기의 주부들>이 본방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프먼은 2006년 리즈 위더스푼(<앙코르>)등과 함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수상은 못했지만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저 높은 곳으로 쏘아진 기분이었다. 당신은 오스카를 얕볼 수 없다. 그것과 타협할 수도 없다. 그건 정상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다. (노미네이트됐단 얘길 듣고) 아침 내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소릴 질렀다.”

“배우로서 내가 가진 가장 큰 경험은 이 일이 프리랜스 업무라는 것이다. 프리랜스 업무에서는 항상, 내 마지막 일감이 진짜 마지막 일감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게 된다. 쇼가 있어야 이 직업도 안전성이 있지.”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음을 이제 인정하면서도 그의 태도는 어딘가 조심스럽다. 마흔살이 넘어서야 시작된 이 쇼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의 불안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녀는 덧붙인다. “향후 5년? 남편하고 누드신 한번 찍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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