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왔다. 올 겨울 엄정화는 시끌벅적한 두개의 선언문으로 막을 올렸다. 순결한 척하는 자들이 신곡 <Come 2 Me>의 무대를 향해 내뱉은 단발마가 수그러들기도 전에, 대니얼 헤니와 공연한 로맨틱코미디 <Mr.로빈 꼬시기>가 개봉을 알려온 것이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궁금하나 그녀는 언제나처럼 세련되게 무심하다. “음, (3초간 숙고) 특별히 힘든 게 있나 뭐. 7집이랑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함께 내면서도 그랬으니 처음도 아니고. 사실 둘을 동시에 가자는 계획은 아니었다. 9집 음반을 여름에 내놓을 생각이었는데 촬영이 딜레이되면서 음반도 늦어진 거다.” 별다른 설명없는 이 말은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자신이 있다는 조용한 배짱이기도 하다.
운좋게도, 사람들은 스크린에서의 엄정화와 쇼 무대에서의 엄정화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받아들인다. 엄정화의 9집 앨범 <Prestige>와 영화 <Mr.로빈 꼬시기>는 그 사실을 잘 아는 예술가의 ‘놀이’에 가깝다. 가식없는 플로어용 비트로 넘쳐나는 새 앨범의 기운과 워킹 타이틀 영화처럼 말쑥한 <Mr.로빈 꼬시기>는 놀 줄 아는 언니가 지닌 당당한 자긍심의 양면처럼 서로를 비춘다. 물론 혹자는 <Mr.로빈 꼬시기>를 엄정화의 가장 판타지 같은 연애담이라 부를 것이다. 미스터 퍼펙트와의 연애를 꿈꾸는 30대 M&A 애널리스트라니, <싱글즈>의 동미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유정처럼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여자는 확실히 아니다. “판타지 같은 연애담. 그건 맞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민준이라는 캐릭터가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것들이 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까 하는 30대의 고민들 말이다.” 언제나 그처럼 맛춤복 같은 행보를 고심하냐는 질문의 대답은 “나는 직관적이다”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인터넷을 뒤집어놓았던 첫 무대 역시 직관에 따른 것이었단다. “첫 무대 난리난 거 나도 안다. (웃음)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나로서는 첫 무대가 임팩트있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었을 뿐이다. 정말 촌스럽다. 서른 넘은 여자는 끝이라는 건가. 다들 그런 식으로 한계를 만들며 사는 것 같다.”
엄정화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지 않는다 말한다. 그 같은 태생적 자신감이 그녀를 지난 10년간 배우와 가수를 병행하면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예술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고된 책임감도 따른다.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롤 모델 같은 게 전혀 없다. 나처럼 활동해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을 홀로 개척해야 한다는 건 힘든 일이고 책임감도 따른다. 물론. 계속해서 잘해낼 거다.” 코앞에 앉아 있을 땐 함께 플로어에서 흔들고 싶은 선배 언니 같더니 마지막 의상을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말걸기 힘든 괭이의 묘력이 번득였다. “삼십대의 섹시함이 무슨 의미냐고? 나에게 이십대의 섹시함과 지금의 섹시함은 차이가 없다. 뭐 다를 게 있나. 무대에 섰을 때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내 몸에 쫘∼악 반사되는 순간 내 자신이 너무도 섹시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거. 너무 좋다.” 순간 엄정화의 눈이 커졌고, 동공은 세로로 좁아진 듯했다. 언니가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