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운 일상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낯선 풍광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다. 나른해진 신경은 스스로를 진짜 사랑하는 방법, 그리하여 누군가를 향한 진심어린 호의까지 발견할 수 있는 촉수를 발달시킨다. 휴가를 이용한 여행은 그런 것이다. <왓 위민 원트>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처럼 의미심장한 제목의 영화를 만들던 낸시 메이어스 감독의 새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의 원제는 ‘휴가’ 혹은 ‘휴일’(The Holiday). 명확하고 함축적이다. 연말연시의 풍요로움, 여행지의 낭만, 로맨스의 설렘까지 우리가 휴가에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담아낸 종합선물세트의 제목으로는 제격이다.
선물세트에 있어 다양함은 필수조건, <로맨틱 홀리데이>는 두명의 주인공을 좇는 이중 플롯을 구사한다. 예고편 제작자 아만다(카메론 디아즈)와 웨딩 칼럼니스트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럿)는 각각 따뜻하지만 삭막한 LA와 춥지만 아기자기한 런던에 살고 있다. 일중독자 아만다와 어수룩함이 친숙한 아이리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맞닥뜨린 실연. 아만다의 동거인 이단(에드워드 번스)은 어린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고, 아이리스가 3년 동안 짝사랑하던 회사 동료 재스퍼(루퍼스 스웰)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른 여자와의 약혼 사실을 발표한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괜찮다는 절망감에 휩싸인 두 사람은 휴가 동안 집을 바꿔 지내는 인터넷 사이트를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서로의 공간을 향해 떠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로운 환경, 새로운 관계 그리고 새로운 자신의 모습이다.
성차(gender)에 대해 인식하면서 자신의 결함을 깨닫거나(<왓 위민 원트>), 잊고 살았던 자신의 진가를 발견하는(<사랑할 때…>) 등 낸시 메이어스의 매끈한 로맨틱코미디를 완성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미묘한 성장이었다. <로맨틱 홀리데이>에서 성장을 담당하는 캐릭터는 아이리스다. 그의 에피소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아만다의 동료인 영화음악가 마일스(잭 블랙)와의 로맨스가 아닌, 할리우드 황금기의 시나리오 작가 아더(엘리 월러크)와의 따뜻한 만남이다. 아이리스는 거대해진 영화산업의 주변으로 밀려난 아더를 사려깊게 응원하고, 아더는 “왜 자신을 조연 취급해? 당당히 인생의 주연이 돼야 하는데!”라며 아이리스를 독려한다. 결국 “상대가 상처를 줘도 그걸 믿지 않고, 아닌 걸 알면서 올인하던” 아이리스는 “병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새 인생을 살 준비를 마친다. 코미디영화 속 현대 영국 여성으로는 처음 등장하는 케이트 윈슬럿의 편안한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겉으로는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는 아만다의 에피소드는 아이리스에 비하면 한결 ‘판타스틱’하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다소 우울한 상태에서 휴가 첫날을 마무리하려던 차에 들이닥친 아이리스의 꽃미남 오빠 그레엄(주드 로)과의 모든 일들은, 휴가지에서의 짜릿한 연애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던 모든 것들을 충족시킨다. 15살 이후로 울어본 적이 없는 아만다가 끝내 진심어린 눈물을 흘리게 되는 모습은 순수의 회귀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퇴행처럼 느껴진다. 메이어스 감독이 자신의 두 전작에서 보여줬던, 페미니즘의 발랄한 문제제기를 마무리짓기 꺼리던 측면을 아만다에게 몰아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면, 여성성을 무기로 차별화된 웰메이드 로맨틱코미디를 만들어온 노라 에프런(<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각본,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연출)과 메이어스는 좋은 비교 대상이다. 에프런이 할리우드의 고전영화에 대한 애정을 중요한 설정으로 끌어들이고 고전영화의 위트를 계승하는 대사를 구사했다면, 메이어스는 여성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흥미로운 갈등으로 엮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LA의 영화업 종사자들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로맨틱 홀리데이>에는 과거 에프런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이리스는 아더가 권해준 옛날 영화들을 보면서 당시 여배우들의 당당함을 깨닫고, 마일스는 위대한 영화음악가들을 찬양하는 대사를 읊어댄다. 마일스가 비디오숍에서 아이리스에게 <졸업>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뒤편 손님으로 노년의 더스틴 호프먼이 깜짝 출연할 정도다.
<버라이어티>의 저스틴 챙은 <로맨틱 홀리데이>의 리뷰에서 “멋진 로케이션, 더욱 멋진 배우, 감상적인 사랑 이야기… (중략) 낸시 메이어스는 여자들이 원하는 것(What women want)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아프지 않고 성장하는 것, 혹은 커다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비단 여자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그걸 이룬다. 아이리스가 구질구질한 짝사랑을 그만두게 되는 것은 그의 옛사랑이 워낙 ‘찌질하기’ 때문이고, 야무진 생활인을 대변하는 아만다와 그레엄이 대서양을 사이에 둔 원거리 연애에 대한 불안을 그토록 쉽게 떨쳐버린 것은 끝내 찜찜하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한 선물꾸러미에 냉철한 현실 반영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어쨌든 기꺼이 설레고 싶은 이들에게 기꺼이 추천할 만한 선택으로, <로맨틱 홀리데이>는 옳은 길만 가면서도 기대를 어긋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