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마틴 스코시즈가 아카데미 감독상에서 또다시 탈락했을 때 마치 구조조정당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에비에이터>가 시원찮았음에도 이 정도 했으면 이제는 한번 받아도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디파티드>를 보니 이런 연민도 사라진다. 어떻게 <무간도>보다 30분 이상 긴 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이야기를 짜는지 그리고 ‘삐까뻔쩍한’ 캐스팅으로 겨우 조금 센 드라마 정도의 캐릭터 앙상블을 만들어내는지 놀라울 따름이다(물론 <디파티드>는 재미있다. 다만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와 비교하면 실망스럽다는 이야기다).
휴대폰 위치추적은 왜 안 하는가에서 결정적인 증거인 녹음이 남았는데 콜린이 어떻게 훈장을 타느냐까지 이 영화의 논리적 허점을 짚는 이야기도 이미 많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이처럼 빈구석이 아니라 지나치게 토를 다는 듯한 한 장면을 보면서였다. 빌리를 프랭크 코스텔로 조직의 잠입요원으로 몰아넣기 위해 퀴넌 반장과 디그냄이 다그치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디그냄은 연좌제를 끌고와 빌리를 다그친다. 너네 삼촌은 쥐새끼고 너네 사촌은 개새끼니 너는 똥물에 가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빌리가 잠입요원이 되는 데 이렇게 장황한 관객 설득이 필요한 것인지 의아하다. 어차피 상명하복 조직에서 시키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는 거다. 빌리도 다른 두 사람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 영화는 (배경이) 이 정도니까 빌리가 (잠입)하는 게 맞지 않아? 라고 계속 ‘관객’을 설득하려 한다. 이건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영화의 윤리적인 알리바이 장치처럼 보인다. 인간의 파괴적 또는 자기 파멸적 성격을 부각해온 스코시즈가 이런 자기 변명 같은 걸 늘어놓는 게 어색하고 살짝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 장면과 대구되는 게 마지막의 디그냄이 콜린을 죽이는 장면이다. 결정적인 물증에도 불구하고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콜린이 왜 이렇게 죽어야 했을까. 게다가 영화의 맥락으로 보면 디그냄은 콜린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다만 상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에게 아주 사적인 복수를 할 따름이다. 사적인 복수를 정의의 실현으로 연결시키는 할리우드의 윤리의식이 이 마지막 장면에 스며들어 있다. 그런 식의 악의 소멸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착잡한 시작이고 찜찜한 결말이다.
그리고 계속 궁금해 미치는 거 하나. 노란 봉투는 왜 개봉되지 않는 거지? 노골적으로 들이댔던 열쇠를 자물쇠에 꽂지 않는 건 플롯상의 문제를 떠나 관객에 대한 결례다. 아무개 변호사를 찾아가라든지 아니면 ‘아이 러브 유’든지 하다못해 옥상에 있는 무말랭이는 언니가 갔다 먹으라든지 뭔가 적혀 있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는가. 그 봉투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영화가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제는 그것을 알기 위해 할리우드와 충무로가 나서야 할 때다(<X파일> 배경음악 깔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