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 번째 장편 개봉한 <그 해 여름>의 조근식 감독
2006-12-13
글 : 박혜명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머리 쓰지 말고 소박하게 가보자고 생각했다”

한 남자의 40년 전 사랑을 되밟아가는 <그 해 여름>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사랑이 시대의 폭압 때문에 깨져버리는 아픔을 담고 있다. 스무살 초반에 겪었던 그 짧은 사랑은 순수하고 안타까운 기억으로 봉인되어 60살이 된 남자의 눈에서 여전히 눈물이 나게 한다. 조근식 감독의 데뷔작 <품행제로>(2002)가 우리의 학창 시절에 관한 기발한 화술의 회고였다면 <그 해 여름>은 멜로 세계의 규칙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익숙한 방식의 추억담이라고 하겠다. 두 번째 장편을 개봉하고 난 조근식 감독을 만났다.

-편집 기간은 얼마나 됐나.
=개봉 일정에 맞춰 움직이다보니 그리 여유롭진 못했다. 한달 정도?

-편집할 때 포인트를 둔 부분이라면.
=개봉하고, 결과물을 보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기자와 평론가들이 좋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품행제로>에 비해서 뭔가 새롭고 자극적이고 재치있고 기발한 걸 기대했다면 이번 영화를 보고 뻔하고 상투적이다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는 시나리오도 그렇게 썼지만 현재-과거를 엮어 서사적인 틀을 가져가려고 했다. 근데 영화를 찍다보니 내가 이런 서사적 구성까지 완벽하게 감당하기엔 좀더 내공이 필요하겠구나, 흉내낼 게 아니라 좀더 나이가 먹고 깊어지고 담백해질 수 있을 때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일단 들었다. 그리고 두 배우와 만나 많은 얘길 하면서, 굳이 머리 쓰지 말고 소박하게 가보자고 하게 됐다. 우리가 진심을 따라가면 사람들도 그 마음을 따라와줄 거고 좋아해줄 수 있을 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편집의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사적인 구성을 포기하더라도 배우들이 표현해냈던 마음의 리듬쪽으로 가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집 템포에 맞추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지금 상업영화는 <품행제로>를 할 때보다도 더 속도감을 요구하는 것 같다. 애초에 내가 찍고 잡았던 리듬이 사람들의 생각보다 느리다는 걸 편집하면서 알았다.

-그럼 김 PD와 수진의 현재 신들은 찍어놓고 덜어낸 건가.
=그렇다. 애초에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는 단순히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그려내는 나를 떨어져서 바라보기도 했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방식을 취하고 싶었다. 철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내 모습까지도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었는데, 찍어나가면서 보니까 그런 것도 필요없고 그냥 쭉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상업적으로 봤을 때도 애초 방식대로 가면 두 주인공의 감정 흐름을 절단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사람들은 영화 보기를 원하지 읽기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60대의 석영을 이병헌이 아닌 다른 배우를 쓸 생각은 없었는지.
=배우 본인이 하고 싶어했다. 다른 배우를 쓸 생각도 있었지만 배우가 이 정도로까지 욕심을 낸다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우뿐 아니라 작가들과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건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멜로의 클리셰 명장면 다 깔아보자. 그 안을 배우들이 가로지르면서 그전에 멜로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눈빛이나 표정, 행동을 펼쳐 보이면 그 자체가 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업한 느낌도, 사물놀이로 치면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판 잘 어울려 논 것 같다.

-<그 해 여름>이 평이하면서도 돋보였던 부분 중 하나는 말 그대로 배우들의 연기였다. 다양하고 생동감있는 디테일을 끌어내는 기술이랄까. 배우를 지치지 않게 하면서 구슬리는 방법은 어떤 건가.
=<품행제로> 때에 비해 리허설도 정말 많이 했고 리딩도 많이 했고 동선 맞춰가면서 연습도 계속했다. 중요한 건 두 배우에게 답을 주지 않았던 것뿐이다. 답을 주지 않고 대신 끊임없이 요구했던 건, 이 영화의 첫 번째 관객으로서 내가 그 감정에 설득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헌씨는 굉장히 노련하고 똑똑해서 시나리오가 갖고 있는 구성과 그 구성 안의 캐릭터 움직임을 정확히 안다. 내가 병헌씨랑 얘기했던 건 구성은 내가 책임지고 조절할 테니 그에 관한 균형감각은 버리고 최대한 편하고 자연스럽게 가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되게 불안해했다. 그 불안감을 없애주기 위해 대화를 많이 했다. 그 사람도 그걸 극복하기 위해 나를 괴롭혔고, 그렇게 회차가 지나가면서 감을 잡기 시작하더라. 아, 이게 이래도 되는구나. 내가 이만큼까지 해도 되겠구나. 그러면서 서로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대사도 정확하게 딱딱 떨어지게 하던 사람이 말을 굴리거나 중얼거리거나 하더라.

-수애씨는 어땠는가.
=수애씨는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배우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본래 내성적이라 자기 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마음속으론 아니다 싶지만 어쨌든 감독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하긴 하는데 자기 마음에는 안 들어하는 것들이 캐치가 된다. 그걸 무시하지 않고 물어봤다. 왜, 뭐가 불편하니, 이게 왜 안 되니.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친구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설명을 해주고. 그러니까 수애도 점점, 이 사람이 얘길 해보고 싶어하는구나, 내가 불편한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는구나, 라는 걸 알고 자기 얘길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장애가 없어진 거다. 나중엔 뭐 하나만 던져줘도 아, 뭔지 알겠어요, 하더니 눈물 뚝뚝 떨어뜨리고 그랬다.

-석영과 정인이 함께 읍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시퀀스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좋다. 언제쯤 찍었나.
=촬영이 중반쯤 흘렀을 때다. 그때는 정말 우리 셋이 잘 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인 감정이 잘 배어서 그 느낌이 뭔가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면서 싸한 느낌으로 잘 가고 있구나. 이런 느낌으로 갔다.

-전반부는 그렇게 배우들의 감정과 마음의 흐름이 곧 드라마로 치환될 여지가 있었다고 보지만 후반부는 어쨌든 애초의 이야기 설정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많다. 자유로워지기 전에 본인들이 해줘야할 것들이 있는 셈이다. 그런 차이가 전체 리듬을 갈라놓으리란 우려는 하지 않았나.
=했다. 상업영화가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부분, 그 뜨거운 감자를 건드린다는 건 사람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예 떼어내려면 떼어내고, 아니면 치열해야 한다. 각색 초고에서는 시대적인 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셌다. 석영 아버지와 정인 아버지의 관계 설정을 했다. 이를테면 석영 아버지는 당시 지주였고, 어린 석영은 정인 아버지에 대해 동경심을 갖고 있고 그 느낌을 간직한 채 정인을 만나는 이야기. 말하자면 석영의 캐릭터를 좀더 각성된 인물로 만들었었다. 그런데 캐스팅이 어렵고, 주위에서도 깊게 드리워진 시대적 느낌을 지워주길 바라더라. 나도 이 영화를 5천만원이나 1억원으로 찍을 게 아니었고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받아주길 바랐기 때문에 수위 조절이 필요했다.

-마지막 부분에서 석영이 돌을 돌려놓으러 오는 것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인의 장면은 사족 내지 부연의 느낌이 있다.
=그 신은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엇갈렸다. 시나리오상에서는 그 신이 맨 마지막에 있어서 이야기 구성의 반전 혹은 에필로그 기능을 하는데, 영화적으로는 없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석영의 회상신에 합쳐놓았는데도 과잉의 느낌이 있었다. 근데 모니터를 해보니까 그 신이 작용을 하는 거라. 사람들이 충분히 반응했다. 개인적으론 더 깔끔하게 가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좀더 세련되게 만들어볼까, 하는 감독으로서의 욕심은 누구나 갖고 있다. (웃음) 그 욕심을 떠나서 인물들의 마음을 따라가는 상황에 눈높이를 둔 거다.

-<그 해 여름>에서 가장 좋은 장면 중 하나는 석영과 정인이 학교에서 영화를 볼 때다. 그때 보이는 건 우리가 믿고 있는 순수함이다. 그 순수함을 영화적으로 계산하거나 세련되게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담아냈다. 근데 닭살스럽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에 와서 닿았다. <품행제로>에서 중필과 민희가 키스하던 신도 비슷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자기 영화 안에서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사랑이란 건 질서나 전체의 개념에서 보면 통제하기 정말 힘든 것이다. 사랑이 금기나 위반으로 종종 이야기되는 것도 질서 입장에서 보면 가장 포획하기 힘든 감정이기 때문이다. 정말 사회가 좋으려면 한 인간이 각성되지 않고도 별로 피해받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어른의 눈에서 아이 같은 순간이 보일 때를 좋아한다. <그 해 여름>은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다. 하이디의 목장처럼 단순히 순수한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시대성을 피해갈 수 없는 공간에 인물이 놓였을 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순수함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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