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설계에서 제작·촬영까지, 무협판타지 <중천>의 공간 만들기
2006-12-20
글 : 문석

104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본격 무협판타지영화 <중천>(제작 나비픽처스, 감독 조동오)은 인간이 죽은 뒤 49일 동안 머물며 저승으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는 상상 속의 세계 ‘중천’을 배경으로 삼는다. 자연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은 모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일 수밖에 없었다. 이 비현실의 세계를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임무가 미술 파트에 떨어졌다. 시나리오의 상상력을 현실화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미술팀은 밑바탕이 되는 스케치에서부터 촬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질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고민을 해야 했다. <중천>의 김기철 미술감독에게서 주요 공간의 설계부터 제작, 촬영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체적인 미술 컨셉

자연미를 살리되 신기루의 느낌으로

<중천>의 배경은 사람이 죽어서 49일 동안 머물며 이승의 허물을 벗고 저승으로 갈 준비를 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제작진은 이곳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속 공간이라는 점에 앞서,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동양적 사상에서 전체적인 미술 컨셉을 끌어냈다. 결국 <중천>의 전체적인 공간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자연이었다. 김기철 미술감독은 “중천을 인간이 저승으로 가기 전, 보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해 모든 공간에서 자연미 또는 자연과의 조화를 신경썼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판타지영화를 표방한 이 영화가 인간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는 법. “자연미를 살리면서도 실제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신기루 같은 느낌을 공간에 담아야 했다”고 김기철 감독은 말한다. 판타지적인 요소의 상당 부분은 디지털 미술, 즉 컴퓨터그래픽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아날로그 미술 또한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여러 공간을 새롭게 창조해야 했다. 이러한 아날로그 미술 작업에 든 비용만도 <중천>의 순제작비 104억원 중 약 10%에 해당하는 10억원에 달했으며, 준비 기간도 11개월이나 됐다. 중국쪽 미술감독 한충과 협력해 수천장의 스케치를 그리면서 미술 아이디어를 짜냈던 김기철 감독은 “두 나라에서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었으며, 예산 또한 한정돼 있어 무한정 상상력을 발휘할 수만도 없었다”고 말한다.

중천 마을

사후 세계의 고요함

이곳은 이곽(정우성)이 살아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기운에 휘말려 사후 세계인 중천으로 들어와 처음 접하는 공간이다. 중천에 온 영혼들이 7일씩 머무르는 7개의 공간 중 첫 번째 단계인 만큼 이승의 도시와 흡사한 모양새지만, 판타스틱한 공간임을 고려해 소실점까지 커다란 건물이 빽빽하게 이어지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중국 헝디엔에 자리한 대형 스튜디오의 기존 세트는 단층 건물이었지만 CG를 이용해 높이를 올렸다. 흰색, 검은색, 녹색이 대비를 이뤘던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김기철 감독은 하늘의 푸른빛, 연꽃 모양 향로에서 나오는 연기의 흰색, 건물의 진회색과 자줏빛, 땅의 녹색을 배합해 정갈한 분위기를 강조하려 했다. 그는 “죽음 이후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고요함을 드러내려 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배경에 CG로 영험한 분위기의 산세를 집어넣어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 중천 거리에서는 원귀병들과 소화(김태희)의 격돌이 벌어지기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건물 한채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탄취탕

샹그릴라 호수를 재현하라

7일 동안 속세에서 묻은 인간의 냄새를 씻는 공간인 탄취탕은 이곽과 소화가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던 제작진은 중국 윈난성에 있는 샹그릴라의 고산 호수를 보고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산지에 기기묘묘한 수많은 호수들이 자리잡은 이곳에 매료된 제작진은 아예 촬영을 이곳에서 하기 위해 타진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설사 촬영 허가가 났다 하더라도 주촬영지인 헝디엔에서 너무 멀어 시간과 비용을 꽤나 잡아먹을 판이었다. 결국 세트장 안에 샹그릴라와 유사한 모양의 인공호수를 만들기로 결론을 내린 <중천>팀은 헝디엔 스튜디오 안에 철골과 우레탄을 이용해 7∼8개의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안에 물을 채워 촬영을 진행했다. 샹그릴라의 옥색 물빛을 원했던 제작진은 아날로그적인 효과로 물빛을 만드느니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보통 물을 사용했다.

참선관

저승으로 인도하는 경건함

참선관은 영혼에서 속세의 때를 빼고 저승으로 갈 수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필수적인 연꽃 향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헝디엔 스튜디오 내에 지은 황궁 세트 옆 후궁터에 차려진 참선관 세트는 연꽃의 분홍빛을 주조로 삼아 은은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꾸며졌다. 엄숙함을 자아내기 위해 담벼락을 CG로 지워 넓은 터에 건물이 홀로 존재하는 듯 보이게 했고, 연꽃 연기 뒤에 보이는 건물의 불빛도 은은한 연노란색 톤으로 잡았다. 김기철 감독은 “마치 절에 들어갔을 때 마음이 경건해지는 느낌을 전하려고 공간을 꾸몄다”고 말한다. 야간 촬영이 진행된 탓에 건물 아래 계단과 건물 하단에 작은 등 1천여개를 배치하기도 했다. 연꽃 향을 만드는 향로는 연꽃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김기철 감독은 “조동오 감독은 애초 불교 문화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말자고 했지만 여기서는 연꽃 모양을 장식적인 의미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수로 마을

사랑이 고조되는 강

중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반추(허준호) 휘하의 병사들이 소화가 간직한 영체를 빼앗기 위해 추격하자 이곽과 소화는 이를 피해 달아나다 수상 마을을 만난다. 소화와 이곽은 작은 연꽃배 속에 몸을 숨긴 채 피신한다. 두 사람 사이의 육체적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감정적으로도 격앙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헝디엔 스튜디오의 수상가옥 세트에 1천여개의 종이등을 매달고 촬영된 이 장면에서도 CG는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한쪽 배경에 기암절경을 집어넣어 판타지의 비주얼을 만들었고, 실제 촬영 때는 3척뿐이었던 연꽃배도 수십대로 늘렸으며, 주위 건물들을 다 지워서 강물의 면적도 넓게 보이게 했다. 이 영화에서 종이등은 모두 1만개 정도 쓰였는데, 클로즈업에 대비해 공간마다 모두 다른 모양의 등갓을 제작했다. 비라도 올라치면 색이 빠지고 전구가 터져 계속 교체하기도 했다. 다행히 종이등 1개 값이 우리 돈으로 수십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고, 설치에 동원된 일꾼의 노임이 쌌다는 점은 중국 촬영이 준 선물이었다.

이승의 거리

가장 세속적인, 가장 특이한

이승의 거리는 중천 세계에서 가장 특이한 공간이다. 이승 세계와 똑같이 꾸며놓은 이곳은 여전히 이승에서의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불법 구역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연미와 경건한 느낌이 주가 된 다른 공간과 달리 이승의 거리는 화려한 색채가 두드러지고 북적거리는 분위기로 구상됐다. 미술팀은 공중에는 원색의 종이등을 달았고, 지상에는 야시장처럼 좌판과 점포를 만들었다. 또 모든 공간과 소품에는 현실적인 질감을 부여했다. 현실과 유사해 가장 편안했을 듯한 이곳에서의 촬영은 예상과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이때는 우기의 한복판이었던 탓에 2500개의 종이등을 수시로 떼었다 달아야 했고, 바닥에 뿌려진 연꽃 이파리도 계속 씻어서 말려야 했다. 또 이곳에서는 이곽과 여위(박상욱)가 공중 전투를 펼치는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공간이 여러 대의 크레인으로 빡빡했다. 현실 세계의 소품을 구비하는 일도 김기철 감독에겐 스트레스였다. “영화의 배경은 통일신라시대인데, 당시의 물건을 재현하기도 어렵고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소품만 사용하는 것도 어려운 애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창부신 정자

자연친화적인 멜로 공간

중천에서 음악을 관장하는 창부신이 기거하는 이 공간은 피신한 이곽과 소화 사이의 애정이 깊어지는 곳이다. 창부신은 중천의 천인 중에서도 가장 튀는 기인인데다, 자연친화적인 인물이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공간으로 꾸민다는 게 기본 컨셉이었다. 또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장면은 대전투가 펼쳐지는 결말을 향해 쉬어가는 대목이기 때문에 다른 공간보다 부드러운 느낌도 살려야 했다. <천룡팔부> 등이 촬영된 중국 방암 세트장의 한 공간은 이러한 미술적 컨셉을 구현할 수 있는 적지였다. 기암과 호수, 정자가 이미 갖춰져 있었던 덕분이다. 다만 정자 옆에 자리한 건물들의 중국색이 너무 강해 제작진은 이들을 모두 철거한 뒤 한국, 중국, 일본색이 아닌 동양적인 느낌의 건물을 만들었다. 건물에는 나무와 꽃을 둘러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또 앞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겨울이어서 나뭇잎과 꽃을 일일이 매다는 것은 미술팀의 당연한 업무였다. “이 공간은 영화 속에서 가장 멜로드라마가 어울리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색깔의 꽃을 배치해서 보여주자고 생각했다”고 김기철 감독은 설명한다.

위령수

영혼을 위무하는 나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신묘한 나무인 위령수는 김기철 미술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을 끝까지 괴롭힌 숙제였다. 영혼을 위무하고 기원을 이뤄주는 이 나무가 거대하고 살아 있는 느낌을 줘야 한다는 정도의 원칙은 누구나 동의했지만, 어떤 배경에 어떤 모양새로 존재하는 나무인가에 관해서는 모두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비로운 기암이 배경으로 놓인 방암 세트장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어도 나무의 생김새는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김기철 감독은 “헝디엔 세트장 초입에 보면 분재를 전시해놓은 게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굉장히 아름답더라. 결국 분재 몇개의 모양새를 조합해 나무 모양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상상해놓을 수 없을 만큼 큰 나무로 설정했기 때문에 대부분 CG로 창조하면 됐지만, 나무 밑동은 실제로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미술팀은 지름 20m, 높이 12m짜리의 거대한 나무 밑동을 제작했다. 위령수 앞 나무 100여 그루 또한 미술팀이 일일이 심어서 이파리와 꽃잎을 달았음은 물론이다.

천기관

어둡게, 대범하게, 강렬하게!

천기관은 중천의 49일 중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지만, 반추의 무리와 그가 조종하는 수만명의 원귀(寃鬼)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반추의 강력한 ‘다크 포스’가 장악하고 있는 공간이어서 시종 어둠이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천기관은 장이모 감독의 <영웅>을 촬영했던 헝디엔의 진 황궁 세트장에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촬영된 장면은 이곽이 수만명의 원귀를 홀로 격파하며 진격하는 모습이어서 와이드 앵글에 맞게 세세한 것에 신경쓰기보다는 대범한 공간 설계가 이뤄졌다. 반추를 상징하는 검은색과 붉은색의 달을 대비시켜 강렬한 느낌을 자아냈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치워냈다. 김기철 미술감독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거대한 마당에 꽂힌 솟대 비슷한 기둥이었다. 그는 이 8개의 기둥을 없애려 했지만, 스튜디오쪽에서 불가능하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6개의 기둥을 더 세워 위에 화로를 매다는 아이디어를 구상했으며, 결과적으로 좀더 치열한 느낌을 전하는 데 성공했다. 또 조동오 감독은 이곽이 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장면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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