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까지 쫓아간다, 게 섰거라!
‘삼십육계주위상책’. 병법에서도 언급했듯 불리한 싸움에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다. ‘장렬하게 전사’해 이 세상을 등지는 것보다는, 구질구질해도 하나뿐인 목숨을 살리고 보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더 유리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훗날 ‘도망’으로 구긴 자존심을 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대책없는 도피는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 삶의 험난한 싸움에서 패할 위기에 처했거나, 자신이 저지른 죄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피 중인 주인공들. 시간을 벌기 위해, 미결과제 완수를 위해, 아니면 무작정 도망가는 이들의 여정, 지구 끝까지 쫓아가볼까.
5위는 <태양은 없다>의 홍기(이정재). 도망치는 인간 중에 가장 흔하면서도 저질인 사례. 이 인간은 돈 빌려놓고 안 갚고 튀는 인간이다. 돈을 들고 ‘튄’ 홍기를 끝까지 잡으려고 쫓아가는 단발머리 동네깡패 병국(이범수)도 폼새로 볼 때 만만찮은 불량 내공의 소유자로 추측되지만, 그래도 도리상 빌렸으면 갚아야 할 거 아닌가.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면 착실하게 갚기라도 할 것이지, 30억원짜리 빌딩을 사겠다고 큰소리만 뻥뻥 치고, 다니는 흥신소에서 돈이라도 빼돌리면 경마장에 가서 대박 노리기 일쑤다. 멀끔한 외모 덕에 봐줄 만하지만, 하는 짓은 참으로 대책없다. 예쁜 내레이터 모델 미미(한고은)에게 연예계 데뷔시켜주겠다고 뻥치고, 흥신소에서 만난 전직 권투선수 도철(정우성)이 모아온 돈까지 훔쳐 달아나고. 그래도 ‘태양은 있다’고 하니 이 대책없는 남자, 미워해야 해 말아야 해?
4위는 <오래된 정원>의 현우(지진희). 군부독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1980년대.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던 그는 하수상한 시국으로 도피를 결심하고 갈뫼에서 자신을 숨겨주기로 한 윤희(염정아)의 도움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도피 중인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속~편하게 윤희와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던 현우. 그.러.나. 동료들이 모두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도피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결국 17년간의 투옥으로 이어지니, 윤희가 없었다면 달콤했던 6개월간의 도피는 있으나마나 했던 셈. 하나 17년 만에 자유의 몸이 돼 접한 건 윤희가 죽었다는 소식이니. 결국 도피가 남긴 건 17년간의 구속과 가슴 찢어지는 사랑?! 으흐흑 4위.
3위는 <섬>의 현식(김유석). 전직 경찰.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애인을 살해. 딱 답이 나온다. 순순히 자수하거나 곱게 잡힐 것 같지 않은 예감. 역시나 그가 선택한 방법은 외부와 거의 차단된 한적한 낚시터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식의 도피는 마땅한 답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다. 어떤 대안도 없이 불안한 심리상태와 죄책감 등 복잡한 감정으로 뒤범벅된 그는 권총자살을 시도하거나 낚싯바늘로 자해하는 등 무기력하고 끔찍한 생활을 근근히 이어간다. 그는 낚시터 주인 희진(서정)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의존하기도 하지만, 집착적인 그녀의 사랑이 버거울 뿐. 이제는 그녀에게서 다시 도망치고 싶은 현식. 아, 이 불쌍하고 무기력하고 답답한 인생이여. 위로 차원에서 3위.
2위는 <아일랜드>의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와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 원래 그들은 오염으로 인류가 멸망해가는 지구에서 ‘운이 좋아 구제된 줄 아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릭 바이오테크사의 ‘시한부’ 클론일 뿐. 아무리 복제인간이라지만 사람과 똑같이 움직이고 사고하는 그들은 도피만이 살 길이라고 직감적으로 판단한다. 자신을 복제한 톰 링컨과 인질극까지 벌이는 링컨 6-에코는 클론의 표식을 그에게 채우면서, 그가 자신의 클론이라고 주장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둘의 모습에 동감하면서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클론이라는 사실에 섬뜩해지는 것은 웬일? 어쨌든 생존을 위한 클론들의 무한질주 2위, 2위!
1위는 <도망자>의 리처드 킴블(해리슨 포드). 평온한 그의 일상은 외팔이가 집으로 쳐들어오면서부터 엉망이 된다. 그에게 아내가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모든 정황이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게 만드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킴블에게 남은 것은 도망뿐. 죄수 호송열차 사고로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도망인생이 시작된다. 그를 끝까지 쫓는 형사 샘 제라드(토미 리 존스)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아내 사건에 대한 수사도 벌이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진짜 범인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도망으로 다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병원에도 들르는 이 환상적인 도피의 동선. 결국 자신의 무죄까지 밝혀내는 킴블씨! 도망이 병법의 상책임을 영화 내내 증명하신 그분, 제목까지 완벽하게 ‘도망자’의 최고 권좌에 오르신 그분께 1위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