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2006)에는 주인공 코이스티넨이 은행에서 자격 미달이라며 대출을 거절당하는 (그러고는 굳이 옆문을 통해 나가야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그저 스쳐 보낼 수 있는 짧은 장면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카우리스마키의 (최근) 영화임을 재확인케 하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그의 앞선 작품들, <황혼의 빛>과 함께 ‘핀란드 3부작’ 혹은 ‘빈민 3부작’을 이룬다고 흔히 이야기되는 <떠도는 구름>(1996)과 <과거가 없는 남자>(2002)도 주인공들이 은행으로부터 호의를 받지 못하는, 그들 입장에서는 한숨 나오는 순간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들 속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이 은행이란 공식적인 제도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할 만큼 주변부에 속하는 이들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핀란드 3부작’에서 공유지점이 되는 순간들로는 다른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는 온기를 간직한 것인데, 그건 바로 낙담해 있고 피로해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듯 음악이 울리는 장면들이다. 그 장면들에서 음악은 사람들이 그때 경험하는 주로 괴롭거나 슬픈 정서를 어루만지며 그 감정과 서정적으로 공명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래도 카우리스마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영화가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사람들을 그 안에 끌어들여 그들의 힘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이들에게 위안도 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있었던 듯싶다고 말이다.
필름 누아르 속으로 간 루저
다소 편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카우리스마키의 ‘핀란드 3부작’은 앞서 지적한 두개의 공통인수들, 즉 딱딱하게 관료적인 은행과 감정을 건드리는 음악이라는 멀리서 서로 합류할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의 불가피한 공존을 그 생성의 조건으로 삼는 영화들이다. (<떠도는 구름>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서) 카우리스마키 스스로는,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 시카, 1948)의 냉혹함과 <멋진 인생>(프랭크 카프라, 1946)의 행복을 양 극단에 놓고 그 사이 어딘가에 끼인 것으로서 핀란드의 현실을 그려내려는 영화들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천국의 그림자>(1986)를 비롯한 카우리스마키의 초기 영화들도 많은 경우 그 같은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핀란드 3부작’이 무언가 낙천적인 면을 가진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고자 한 카우리스마키의 의향으로부터 나온 산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핀란드 3부작’을 이처럼 고통스런 현실을 뚫고 비추는 ‘빛’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황혼의 빛>은 그 제목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는 대로 세편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희미한 빛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이건 주인공 코이스티넨이 이런저런 고통을 겪은 뒤에 받게 되는 ‘빛’의 양이란 것이 <떠도는 구름>이나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들이 종국에 선사받는 것보다 적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겪는 불행이란 것이 그 이유가 분명치 않아 터무니없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떠도는 구름>의 부부나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에게도 갑자기 닥친 불행은 자신들이 한 어떤 행동 때문이 아닌, 거의 익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보다 물리적으로든 아니면 인식적으로든 상위에 있는 무언가의 힘에 농락당하는 이들로 보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처음 볼 때부터 무시당하고 아무 이유없이 조종당하는 코이스티넨이 훨씬 억울한 인물이라고 느낀다. (그는 별말이 없으니까) 우리가 보기에 그는 “왜 하필 나야?”(Why me?)라고 메아리없는 항변이라도 해야 할 사람인 것만 같다. <황혼의 빛>이 필름 누아르와 만나는 영화라고 볼 때에 그 접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핀란드 3부작’에 속하는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무언가를) 상실한 자로서 루저(loser)를 그리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떠도는 구름>은 갑자기 직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영화였고 <과거가 없는 남자>는 기억과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을 다룬 영화였다. <황혼의 빛>에 대해서는 그처럼 적시하기가 다소 쉽진 않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존재감’이라고 표현할 것을 상실한 남자를 따라가는 영화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상사가 그 이름도 기억해주지 못하고 심지어는 눈앞에서 데이트하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기도 하는 코이스티넨이란 인물은 그의 존재 자체를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그러기를 거부당하는 인물이다.
이 같은 인물이 얻어내야 할 것은 이제 뻔해진다. 그는 영화 종반부에 스스로를 표현하듯 칼을 들고 폭력 조직의 보스를 향해 공격함으로써 명예라고 할 것을 찾기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워낙 뚱한 표정을 짓기에 인물들의 속을 쉽게 내보이진 않지만 여하튼 후반부에, 특히 감옥에 간 뒤로 코이스티넨에게 미세한 변화가 생겼음은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 (화장실 문 옆에 서서 혼자 술을 마시던) 그는 우선 보스에 의해 그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감이 발견되어야 하고 필름 누아르의 어떤 주인공들, 예컨대 <우회>(에드가 울머, 1945)의 알과 <과거로부터>(자크 투르뇌르, 1947)의 제프처럼, 자기도 알지 못할 길에 접어들기도 하고 혹은 고난의 여정에 자처해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코이스티넨은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 ‘남자’를 닮았다. 후자의 인물이 당도한 빈민가는 그 여정에 대한 설명이 불합리할 정도로 잘못 온 곳이지만 알고 보니까 그의 ‘재생’을 위해 꼭 왔어야 할 필연적인 귀착지였다. 바로 이 같은 여정을 코이스티넨은 좀더 처절한 방식으로 되걷고 있는 것이다.
동정 어린 선의의 영화
그러고 보면 카우리스마키가 자신의 인물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방식은 다분히 인위적인 (그리고 도식적으로도 보이는) 설계에 기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문제에 크게 괘념치 않을 것이다. 익명적인 불행이 사람들을 휘감는 세상 속에서 익명적인 희망의 빛을 선사하는 것은 그의 세계 안에서 윤리적일 뿐 아니라 합리적이기도 한 생각이 아니겠냐고 그는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 같은 다분히 목적론적인 픽션 설계는 또 다른 북유럽의 영화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의 것과도 닮은 데가 있다. 하지만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인물들에 대한 동정의 정도가 훨씬 짙다. 그는 폰 트리에와는 달리 진정으로 선의(善意)의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까 웃음과 불안을 동시에 품게 하며 문득 떠오르는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 한 장면이 있다. <떠도는 구름>에서 얼마 전에 실직한 남편이 부인과 함께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매표원에게 소리친다. “코미디라고 했는데 나는 한번도 웃지 않았어!” 이것이 그저 농담인 것만이 아니라 자기 반영적인 측면을 가진 장면이라고 본다면 이런 의문이 들게 된다. 카우리스마키 자신의 영화를 본 실직자가 그 같은 불평을 했는데 이건 정말로 ‘오락적으로’ 웃기지 않은 영화여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주지 못한 영화여서였을까. 주변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즐거움을 주지 못한, 희망을 설파하는 주변인들 이야기의 효용에 대해 카우리스마키 자신은 진정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