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색화동>의 공자관 감독
2006-12-21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에로세계의 무한팽창능력

공자관을 아느냐는 질문에 예, 라고 답하면 남성일 것이다. “중국 감독이냐?”고 반문하면 에로비디오가 끔찍한 공공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성이거나 아님 여성이다. 일반화하긴 좀 그렇지만, 인터뷰에 앞서 한 신입기자는 그의 대표작 리스트를 단박에 토해낸 반면 사진기자는 공자관의 국적부터 궁금해했다. 알 만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공자관은 <깃발을 꽂으며> <만덕이의 보물상자> 등 14편의 장편 출시작을 내놓으며 업계에서 각광받던 에로비디오 감독이다. 그런 그가 장편독립영화를 만들었다. 제2의 봉만대, 라는 수식은 그래서 나온다. 감독 지망생인 진규가 생계를 위해 에로비디오 <올 누드보이>의 조감독이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은 <색화동>(色畵動, The Sex Film)은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됐다. “상영이 끝나고 GV를 하는데 관객이 영화 속에서 다 풀어내지 못한 에피소드들을 궁금해하더라.”

<색화동>은 공자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극중 진규처럼 그 또한 1년여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잡놈 새끼들”이라는 누군가의 욕설을 들었고, 거짓말 헌팅과 도둑 촬영으로 경찰서 신세도 졌고, 1일 출연료 70만원이라는 고액 개런티 여배우의 스케줄에 촬영 일정을 맞추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픽션이지만 80% 정도는 실제다. 그걸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다른 점도 있다. 영화 속에서 진규는 에로비디오 또한 “보통 사람들이 만들고 보통 사람들이 보고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보통 영화”라고 뒤늦게 깨닫지만, 공자관 감독에게 에로비디오의 세계는 생계 해결은 물론이고 분명한 비전까지 줬다.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그는 “군대 갔다와서 시나리오 쓴다고 후배들과 어울리다” 우연히 함께 본 봉만대 감독의 <이천년>을 통해 개안, 개심했다고. “자취방에서 모여서 보는데 정말 ‘와’‘와’ 그러면서 봤다. 에로비디오에도 내러티브가 있구나. 이후에 <쏘빠때2>를 봤는데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었다. 에로비디오는 아무나 찍어도 되는 게 아님을, 감독이 찍었음을 그때 알게 됐다”

비주류에서 출발해 주류로 진입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몰랐던 것일까. 유년 시절부터 로버트 알트먼과 알랭 레네를 가슴속에 품었던 유년 시절 꿈은 영영 유예될지도 몰랐다. “친구들은 ‘그래 너 하고 싶은 것 해야지’ 하면서도 전력이 나중에 드러나면 충무로에서 무시당하고 안 써준다는 말도 하더라. 근데 내 입장에선 그게 옛날이야기처럼 들렸다. 영화만 잘 찍으면 되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설령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난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등 로망포르노와 핑크영화에서 피어난 일본 작가들의 경험담을 영화잡지에서 본 것도 쉽지 않은 선택에 적지 않은 힘이 됐다. 2001년 “나를 놓치면 에로업계의 큰 손실”이라는 자기 PR 끝에 클릭영화사의 조감독이 된 그는 1년 동안 ‘낯 뜨거운’ 세계를 경험했다. “처음엔 정신없었다. 대개 2, 3회차 촬영으로 모든 게 끝나니까.” 대략 난감한 상황들을 아무렇지 않게 느낄 무렵 그는 동시에 그들에게서 프로의식도 느꼈다. “변산반도의 뻘밭을 지나다 풍경이 좋아서 차를 멈춰 세우고 찍은 적이 있다. 구경꾼들이 있는데도 배우는 홀라당 벗고 감독은 찍느라 정신없고. 나중에 경찰이 왔는데 잠깐 막아서서 승강이하는 사이에 다 찍고 올라가더라.”

이필립 감독이 독립한 뒤 그에게도 ‘입봉’ 기회가 왔다. 연출료는 스타급 감독의 절반인 200만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극단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극장주와 극단원과 연출가가 성을 매개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는 내용”의 줄거리로 친구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위험한 연극>의 현장은 만만치 않았다. 감독이 프로듀서의 몫까지 총괄해야 하는 에로비디오 현장의 상황을 감당할 만한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촬영 끝내고 나서 편집하는데 못 찍은 것투성이었다. 대표가 편집본 보고 나서 한숨 쉬더라. 연출이 장난 아니구나, 남의 돈으로 찍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자책했다.” 이후 직접 촬영을 맡으면서 프로듀서 일을 분담해준 이승수 대표가 그래서 고맙다. 그런데 한참 잘나가던 2003년 10월에 퇴사한 까닭은 뭘까. “매너리즘에 빠지더라. 더블 액션 맞으면 넘어가고, 다음 컷하고 붙을지만 따지고는 있더라. 한달에 한편씩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들은 무시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창작이니까.”

2003년 10월 클릭영화사를 퇴사한 뒤 그는 바깥 세계를 뒤늦게 경험했다. 외주제작사에서 시트콤 <밥만 먹고 못살아>를 연출했고, 이후에는 다른 2명의 감독들과 함께 성을 소재로 한 3부작 옴니버스영화를 기획했다. “성을 다루는 내 능력을 스카우트한 것 아닌가. 그들이 경멸한다거나 그런 건 느낄 수 없었다. 사실 주류 영화계 또한 계몽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원하는 것 아닌가.” 옴니버스영화 제작이 결실을 얻진 못했지만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클릭영화사 이승수 대표를 찾아가 <색화동>의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바깥에서 보니까 한때 몸담았던 그곳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있더라. 상업적인 가능성도 있는 소재라고 봤다. 난색을 표하는 대표에게도 요즘 에로비디오 시장이 어렵지 않나, 에로물도 만들지만 다른 장르의 영화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빨간 비디오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이들이라면, <색화동>은 깜짝 놀랄 만한 영화다. 12월9일부터 20일 동안 에로 비디오를 만들던 스탭들이 모여 12회차의 촬영으로 완성한 영화라고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추위였다. 그전까지는 주로 실내에서 촬영하다 보니 적응이 안 됐다.”

나 홀로 즐기던 외톨이 관객을 상상하다 웅성거리며 반응하는 관객과 조우한 그는 “내가 만든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보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 만족감을 드러내면서 배로 불어난 아쉬움도 털어놓는다.

“콘티를 만들 때부터 영화 문법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것 아닌가 싶다. 뭔가 쇼킹한 것을 기대했던 이들은 너무 밋밋하다고 하더라. 큰 화면을 연상하면서 찍긴 했지만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인물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장면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에로 비디오 만들었다는 이력을 지우기 위해 애쓴 흔적들도 보인다.”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그는 다음 작품에서 해소할 생각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에로 배우들의 고충을 지금 인터뷰를 통해 취재 중이다. 다음 작품은 민망한 상황을 웃음으로 견뎌내야 하는 그들의 속사연을 담고 싶다. 에로 배우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노출 때문인지 다들 꺼려해서 캐스팅이 쉽지 않겠지만. (웃음)” 성에 대해 자유롭게 ‘썰’을 푸는 작은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싶다는 그의 두 번째 ‘색화동’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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