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1번째 시리즈 <007 카지노 로얄>에 접속하는 6가지 코드
2006-12-26
글 : 장미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 잘 빠진 양복을 차려입은 채 마티니를 주문하거나 멋진 자동차를 거칠게 몰아대던 본드는 부풀어오른 근육질 몸매만큼 한껏 화끈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개봉한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높은 첫주 수입을 올렸다고 하니 박스오피스 성적 역시 화끈하기는 마찬가지. 갖가지 루머와 우려에도 시리즈 중 21번째 작품인 <007 카지노 로얄>은 제6대 제임스 본드로 등극한 대니얼 크레이그를 앞세워 영국, 미국 등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며 흥행 돌풍의 중심에 섰다. <007> 시리즈가, 무엇보다 제임스 본드가 확 달라졌다고들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한 당신. 그런 그대를 위해 역대 <007> 시리즈와 차별되는 <007 카지노 로얄>만의 특징을 한데 간추려 모았다.

point 1. JAMES BOND

기름지고 우아했던 본드는 잊어라

제임스 본드, 세계 최고의 스파이이자 바람둥이. 숀 코너리가 최초의 본드로 등장한 이후 제임스 본드들은 대대로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이미지를 고수해왔다. 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적들과 싸우되 양복, 구두, 시계가 완벽하게 반짝이는 삼원일체 스타일을 고수해야 하고 여자들을 자주 침대 위로 쓰러뜨리되 천박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불문율. 그 밖에도 팬들이 늘 뒤따르는 아름다운 외모와 적을 손쉽게 제압할 훤칠한 키의 소유자일 것, 머리칼과 눈동자는 넘치는 남성성을 상징하듯 다소 짙은 색일 것, 빈정대는 듯한 영국 악센트를 지닌 영국 출신 배우일 것 등 자잘한 법칙들이 언제부터인가 전해내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제임스 본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 배우, 머리칼이 번쩍이는 옅은 금발인데다 눈동자마저 투명한 푸른빛이다. 185cm의 늘씬한 피어스 브로스넌에 비해 고작 5cm 작을 뿐이건만 야구선수만큼 육중한 어깨와 축구선수마냥 굵은 허벅지를 지닌 탓에 유난히 땅딸막해 보이니 이건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영국 출신인 점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조건에 어긋나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에 낙점되자 언론들은 대놓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본드를 ‘재미없는, 김빠진’ 등의 뜻을 지닌 bland란 단어로 교체해 약을 올린 “그 이름은 블랜드, 제임스 블랜드(bland)”(<데일리 미러>), 제임스 대신 ‘파산한’이란 의미의 broke를 인용한 “그 이름은 본드, 파산한(broke) 본드”, 외에도 “아얏! 아얏! 7”(<더 선>), “크레이그의 007은 기어를 넣을 수 없다”(<데일리 뉴스>) 등 다분히 선정적인 악평들이 이어졌다. <007> 시리즈의 팬들 또한 잠자코 있지 않았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머리칼과 눈동자 색깔, 키, 외모 등에 불만을 토로하던 그들은 급기야 “<007 카지노 로얄>을 보이콧하자”며 craignotbond.com이라는 사이트까지 개설해 관객을 선동했다.

사실 대니얼 크레이그를 뽑지 않더라도 본드 지망생들은 줄을 이었다. 본드 역할을 위해 준비 중이라던 <엑스맨> 시리즈의 ‘울버린’ 휴 잭맨을 선두로, 본드를 계속 맡고 싶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던 피어스 브로스넌, 한때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던 헨리 카빌, 미국 TV시리즈 <ER>의 고란 비스닉 등 많은 남자들이 본드를 연호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배우들을 염두에 뒀지만 <레이어 케이크> 이후 대니얼은 선발 주자로 나섰다. 그는 섹시하고 매력적이며 남성적인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제작사쪽의 설명대로 대니얼 크레이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를 비롯해 <로드 투 퍼디션> <실비아> 등에 승차하며 안정적인 연기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당시 몇몇 친구들은 앞으로 내가 다른 역할을 맡지 못할 거라며 본드를 선택하는 걸 반대했다. 물론 나 역시 오스카를 원하지만 내겐 기회가 주어졌다. 그건 내가 도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위치로 나를 끌어올릴 수 있었고 그곳은 그닥 나쁜 장소가 아니었다.”

마침내 대니얼 크레이그는 본드를 손에 넣었고 첫 미션을 수행했다. 우아했던 이전 본드보다 열배는 더 괴팍하고 팔팔한 새로운 본드는 역대 최고의 액션을 선사한다. 살인면허를 거머쥔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수 역시 잦지만 마침내 완벽한 킬러로 변신한 뒤 유명한 이 한마디를 날리는 폼은 여느 본드 못지않다. “본드, 제임스 본드.” 열혈 안티팬들의 성화에도 크레이그표 본드는 다음 시리즈에도 무사히 승차한 상태.

역대 역대 제임스 본드

1. 숀 코너리/ <007 살인 번호>부터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까지 7편에 출연했다.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끊은 <007 살인 번호>는 숀 코너리의 육신을 빌려 본드 신화의 기반을 닦았다.

2. 조지 레젠비/ <007 여왕폐하 대작전> 한 작품에 출연한 뒤 곧바로 하차한 조지 레젠비는 유일한 호주 출신 본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한 뒤 은퇴하는 꽤 독특한 본드를 연기했다.

3. 로저 무어/ <007 죽느냐 사느냐>부터 <007 뷰 투 어 킬>까지 7편을 거쳤다. “무어는 미남이고 부드러워 제임스 본드가 되기에는 너무 무기력하다”는 평처럼 신사적인 이미지의 본드.

4. 티모시 달튼/ <007 살인면허> <007 리빙 데이라이트>.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달튼은 단 두편의 영화를 남긴 채 날카롭지 못한 카리스마를 접었다.

5. 피어스 브로스넌/ <007 골든 아이>부터 <007 어나더데이>까지 5편에 캐스팅됐다. “캐스팅의 일부가 아니라 예술 연출의 절묘한 솜씨에 가깝다”는 호평을 받았던 브로스넌은 일부 팬들에게 대니얼 크레이그보다 멋진 본드로 남아 있다.

point 2. ACTION

직업정신 투철한 아날로그 액션

전세계 유명 관광지란 관광지는 다 돌아다니며 연애 행각을 벌인다는 잔소리를 들었던 역대 본드들과 달리 제6대 본드는 온몸을 던져 적들과 싸우는 투철한 직업정신의 소유자다. 특히 조직의 끄나풀을 끈질기게 뒤쫓는 도입부 장면은 기존 <007> 시리즈와 이번 작품의 차이점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야외도박판.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모여든 가운데 코브라와 몽구스가 혈투를 벌인다. 몽구스가 코브라의 목을 물어뜯자 고함 소리가 한층 높아지며 점차 혼란으로 빠져드는 그곳에서 눈매가 매서운 남자가 얼굴에 화상을 입은 다른 남자를 침착하게 관찰하고 있다. 근육질의 팔뚝을 드러낸 정찰자는 제임스 본드. 앞으로 벌어질 추격전을 예상이라도 한 듯 양복이 아닌 작업복 차림이다.

같은 편의 실수로 적을 놓칠 지경에 이르자 급기야 격에 맞지 않게 헐떡이며 달리고 불도저에 몸소 승차하는가 하면, 근처 공사장의 철골구조물을 사정없이 타고 오르고 흙먼지를 묻혀가며 고공점프를 시도하는 등 온갖 방법을 총동원한다. 이만하면 영국식 영어를 내뱉으며 지적인 척하는 그 본연의 모습이기보다 할리우드영화 속 여느 열혈 형사 캐릭터에 어울리는 설정이 아닐까 싶으나 그래도 여전히 본드는 본드. 운전솜씨 하나는 일품인데다 값비싼 자동차에 눈독 들인다는 불문율은 여전하다. 특히 본드가 모는 날렵한 푸른색 애시턴 마틴은 남자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자동차. 미친 듯이 질주하거나 다급히 선회하는 모습뿐 아니라 멈춰 있을 때의 아름다운 자태 역시 눈길을 끈다. 이전 시리즈에서 스파이질을 가능케 했던 각종 신무기들의 등장은 휴대폰, 도청장치 등에 그치며 조금 추춤했으나 아날로그적인 액션이 그보다 더 강세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인 셈.

point 3. SPY

사고뭉치 신입요원에서 천하의 영웅으로

본드가 처음부터 완벽한 스파이였을까? 원작자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소설을 토대로 만든 <007 카지노 로얄>은 신화적 위치에 오르기 전의 제임스 본드를 그린다. 그때의 본드에게서는 철두철미한 요원이 아니라 살인에 익숙지 않고 사랑에 울고 웃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 더욱 강하게 엿보인다. 더블오(00), 즉 007이란 살인면허를 갓 따낸 신입요원 본드. 킬러 본능에 서서히 눈뜨는 중이나 아직까지는 실력보다 오기가 앞서는 상태다. 대사관에 침입해 총을 난사하는 사건까지 저지르고 다니니 M에게 “적에게 던져주고 싶은 심정이다”라는 끔찍한 지탄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적을 단숨에 제압하는 힘과 무술 실력, 회전이 빠른 두뇌는 물론, 한번 노린 자는 반드시 붙잡는다는 열의를 지녔으니 M16의 다른 요원들에 비해 단연 군계일학. 그리하여 M은 본드의 팔목에 위치추적기를 심은 다음 몬테네그로에 위치한 카지노 로얄로 그를 파견해 게릴라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르 쉬프(매즈 미켈슨)의 체포를 도모하려 한다.

본드, 악당, 그리고 미녀. 이 상황에 덧붙여지는 건 역시 아리따운 여자다. 본드에게 자금을 대주는 역할을 맡아 파견된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는 지적인 눈매가 매력적인 여인. 육체미로 어필했던 다른 본드걸과 달리 재기어린 혀를 지닌 그녀는 본드가 이후 뭇사람들을 불신케 만드는 비운의 첫사랑이다. 여느 본드걸처럼 남모를 비밀을 지닌 듯한 베스퍼는 처음에는 본드의 접근을 부드럽게 거절하나 고문을 받은 이후 갑작스레 그의 품에 안긴다. “쾌락의 대상”이 “인생의 동반자”로 바뀌자 은퇴까지 생각하는 본드, 하지만 그의 앞에 예상치 못한 배신의 음모가 찾아든다. “교훈을 얻었군.” M의 말처럼 이를 계기로 그는 완벽한 스파이로 탈바꿈하고 이 순간 우리가 아는 제임스 본드가 탄생한다.

point 4. BOND GIRL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아찔한 그녀!

의자에 앉은 채 지루한 계산에 몰두할 법한 회계사란 직업을 지닌 베스퍼. 제임스 본드가 내뱉는 유혹의 말들을 모두 되받아치는 재치는 물론, 성적 나쁘고 걸걸한 기존의 본드걸들과 달리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에 벌벌 떠는 유약한 성품의 소유자다. 이는 모두 본드걸의 존재를 비판하기 바쁜 일부 관객을 위한 나름의 업그레이드 전략이지만 실상 베스퍼란 인물은 다른 본드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거의 모든 시리즈를 장식했던 수영신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고 본드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대사나 달콤한 아첨의 말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 태도 역시 그대로다. 본드걸이 품고 있는 배신이란 모티브 또한 변함이 없는데 이후 밝혀지는 사실들에서 베스퍼의 마음 씀씀이를 확인할 수 있더라도 그 전제 자체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여러 결점에도 <007> 시리즈를 습관처럼 계속 보게 되듯 이번 본드걸 역시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란 건 주지의 사실. 손꼽을 만한 이전 본드걸로 <007 살인 번호>의 허니 라이더 우르술라 안드레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KGB 첩보원 아니야 아마소바를 연기했던 바바라 바치, <007 언리미티드>에서 크리스마스 존스로 나왔던 데니스 리처드, <007 어나더데이>에서 최초의 흑인 본드걸 징크스로 등장했던 할리 베리 등이 있다.

point 5. M

피도 눈물도 없는 지지자

M16 요원들을 이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상관 M으로 등장하는 배우는 주디 덴치. 마틴 캠벨 감독의 첫 시리즈 연출작 <007 골든 아이>부터 <007 카지노 로얄>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M으로 출연했다. “너를 요원으로 승격시킨 게 실수였다.” “너는 시체들을 몰고 다닌다.”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악담을 퍼붓고 “내 집에 다시 한번 발을 들이면 죽을 줄 알라”며 선을 긋는 그녀는 본드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듯하나 실상 그의 실력을 믿고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지지자. 사랑을 잃고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본드와 통화하면서 슬쩍 감춰놓은 동정심을 비치기도 한다. 버번을 좋아하는 최초의 여성 M인 그녀 외에도 코냑을 좋아하는 두명의 남자 M들이 <007> 시리즈를 수놓았다. 제1대 M은 <007 살인 번호>부터 <007 문레이커>까지 총 11편에 출연한 버나드 리, 제2대 M은 <007 옥토퍼시>부터 <007 살인 면허>까지 4편에 등장했던 로버트 브라운이다. 그중 버나드 리는 1981년 1월16일 세상을 뜨고 말아 12번째 <007> 시리즈에는 그에 대한 예우로 M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생김새도 성별도 다르지만 권위적이고 대담한 지도자로 그려졌다는 점은 M을 연기한 세 배우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특징.

point 6. 007

살인을 허가해주는 숫자

더블오(00)는 살인을 허가해주는 일종의 면허증. 지시된 미션을 통과해야 취득할 수 있다. <007> 시리즈의 영문 제목에는 실상 007이란 숫자가 없다. <007 카지노 로얄>의 영문 제목 또한 사건의 무대가 되는 카지노 이름인 ‘Casino Royale’일 뿐. 그럼에도 우리나라로 수입된 뒤에는 그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인지 꼭 007이 붙여져 개봉됐으며 이 전례는 21번째 작품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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