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 망설임, 설렘, 죄책감, 슬픔, 공상, 감사하는 마음. 인간에게는 필수덕목이지만 사이보그에게는 ‘칠거지악’이다.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무표정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일러스트를 사용하여 극중 영군에게 부여된 칠거지악을 묘사했다. 고양이 배를 칼로 찌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죄책감을 표현하는 식이다. 이 잔인과 애교를 넘나드는 일러스트의 작가는 영화의 미술을 맡은 포도아트디렉션의 김선하씨. 그는 “다른 팀원들이 고생은 더 많이 했다. 단지 일러스트가 좀더 구체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인터뷰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은 어떤 이야기로 일러스트를 주문하던가.
=감독님은 칠거지악의 명칭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외부 작가에게 부탁할 생각으로 스케치를 몇장 그렸는데, 감독님이 그걸 보더니 그냥 미술팀에서 해결하라더라. 쉽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걸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어서 즐거운 작업이었다. 나중에는 박찬욱 감독님이 소장하고 싶다고 하셔서 기뻤다. 사인이라도 해놓을 걸 그랬다. (웃음)
-최종 결과물 이전에는 어떤 분위기의 그림들이었는지.
=결과물은 파스텔 톤이지만, 처음에는 판화에서 사용하는 에칭의 느낌으로 그리려 했다. 하지만 선 자체가 섬세해야 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더 잔인했다. 죄책감 일러스트도 원래는 고양이가 아니라 하얀색 사람이 피를 흘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가장 큰 고민은 소녀의 얼굴이었다. 긴 머리 소녀에서 단발로 바꾸고, 무표정으로 그려넣으니 가장 소녀다웠다.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주인공 영군의 마인드에서 그렸다. 사실 이곳 직원들 대부분이 다 신세기 정신병원 환자로 지냈다. (웃음) 칠거지악의 장마다 내 경우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설렘을 묘사한 그림에는 남자들이 떼거지로 날아온다. (웃음)
-일러스트 각 장에 고양이가 등장한다. 어떤 생각에서 넣은 건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다. 고양이는 항상 뭔가 관찰하는 존재 같다. 고양이가 숨어서 어딘가를 지켜보는 얼굴에도 다양한 모습이 느껴진다. 소녀의 모든 감정을 지켜보는 친구 같은 존재로 고양이를 등장시키는 게 좋을 듯했다.
-영화미술은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대학 때부터 CF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 뒤에도 계속했지만 호흡이 너무 빠르고, 내가 원하는 걸 담아내기에는 힘들어서 영화로 왔다. 영화미술은 감독의 아이디어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서 표현하는 작업이다. 퀴즈를 풀어나가는 느낌이랄까? 나의 공상이 관객과 통할 때가 정말 행복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겁내지 않고 다양한 비주얼을 표현할 수 있는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