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멕시코에서 온 제임스 딘, <수면의 과학>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2006-12-28
글 : 박혜명

영국의 <옵서버>는 그를 ‘라틴의 제임스 딘’이라고 불렀다. 2004년 월터 살레스의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 두편으로 큰 주목을 받을 당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대부분의 매체를 통해 ‘가장 뜨겁게 치솟고 있는 라틴 대륙의 젊은 피’로 공인되었다.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아모레스 페로스>(2000)에서 사랑하는 형수에게 “함께 떠나자”고 손을 내밀었던 청년의 아름답고 야성적인 에너지는 한방의 불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는 곧 성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소년의 눈빛을 하고 환상을 잡으러 여행을 떠났다(<이투마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알렉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아모레스 페로스>가 배우 베르날의 떡잎을 틔워준 작품이라면 알폰소 쿠아론의 <이투마마>는 그가 척박한 멕시코 영화계에서 전도유망한 묘목으로 왕성히 자라고 있음을 보여준 예다. 이후 그는 TV영화 <피델>에서 쿠바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아마로 신부의 범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부정을 저지르는 타락한 신부 아마로를 연기하며 자국에서 영화 활동을 이어갔다. <이투마마>의 여행동지였던 루나는 기회의 나라 아메리카로 건너가 케빈 코스트너의 <오픈 레인지>의 조연, 작은 멜로영화 <더티 댄싱: 하바나 나이트>의 주인공, 스필버그의 밝고 유쾌한 드라마 <터미널>의 조연을 거치며 자신만의 금광맥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악랄한 상처의 기억을 가진 복장도착자의 고혹적이고도 슬픈 얼굴(<나쁜 교육>), 젊은 체 게바라의 영혼을 직접 두르기라도 한 듯 숭고하고 지성에 넘친 눈빛(<모터싸이클 다이어리>)과는 비교 언급도 되지 않았다.

베르날의 말에 따르면 <아모레스 페로스>가 개봉하던 그해에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6편에 불과했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영화를 한다는 건 신념의 행동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시간낭비밖에 안 된단 얘기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서 월세를 마련하는 편이 낫다. 내가 연기를 하는 건 신념의 행위이고 애정의 행위이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노력의 행위이다.” 물론 그는 완전무결한 실천적 지성인은 아니다. 홍콩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반대시위에 열흘 내내 참석하기도 하지만 그 일정이 끝나면 영국 그리니치로 날아가서 디에고 루나와 함께 왁자지껄한 파티를 열고 밤새 즐기며 논다. “그저 그런 정도의” 배우였던 부모 밑에서 자라 3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베르날은 고향에서 철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지원하려는 학교가 신입생을 안 받는 바람에 포기하고 유럽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날 멕시코 페소화가 1/4로 가치 하락해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어진 노잣돈을 들고 도착한 곳이 런던이었다. 그곳에서 드라마 스쿨(The 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에 진학한 까닭은 단지 연기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1학년을 보내던 중에 이냐리투 감독에게 연락을 받았고, <아모레스 페로스>를 촬영하는 동안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경험”을 얻으면서 그의 인생관은 바뀌고 말았다.

베르날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찍기 전에 남미 정치사를 공부하고 <아마로 신부의 범죄>를 찍기 위해 성실한 가톨릭 신자의 생활을 했다. 그것은 그에게 단지 연기 디테일 준비가 아니라 세상 공부에 대한 열정이었다. “연기는 지혜와 지식을 얻는 길이다. 그 특별하고 아름다운 방법을 통하면 이전까지 걸어온 것과 완전히 다른 길로 갈 수 있다.” 지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배우의 꿈은 품은 적도 없던 그가 이제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그 영화의 의미다.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 그것이 나를 움직이는가?” 그런 영화들이 자신의 고국에 있고 할리우드의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저예산으로 힘든 여건에서 영화를 찍어왔던 베르날은 할리우드 감독 제임스 마시의 인디영화 <더 킹>(2005)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자기 트레일러를 받아봤다고 한다. “내 옷을 갈아입을 데가 생겨서 기뻤다. 진짜 편하더라.”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로 지성을 쌓아온 베르날은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서 예술적인 자유로움의 폭을 한층 넓혔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 아침에 눈뜨면 꿈을 기억나는 대로 적는 습관을 가졌던 베르날은 이 영화에서 천진한 상상력과 유아적인 욕구불만을 거침없이 풀어놓는다. 기괴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의 모습은 공드리의 자유분방한 연출과 맞물려 순수한 순간들을 빚어낸다. 그는 이런 것들을 믿는다고 말한다. 진실, 상상력, 핏줄, 생명 그리고 자연. “할리우드의 큰 영화들 얘기가 오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다. 매번 자문한다. 내가 유명해지고 싶나? 난 지금 내가 버는 걸로 잘살고 있다. 돈은 필요없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권력과 제도가 길들일 수 없는 에너지의 땅과 어울리는 배우다. 적어도 그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세속적 욕망 없인 인간다울 수도 없는 이 땅에서 청년 베르날의 태도는 분명 드물고 귀한 것이다. 지사의 풍모이건 털이 덥수룩한 귀를 흔들어대는 아이의 모습이건, 베르날의 꿈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다.

사진제공 영화사 스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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