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 베스트 5
2007-01-0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해를 마감하는 <씨네21>의 큰 잔치 ‘올해의 영화, 영화인’의 선정 작업은 이번에도 뜨거웠다. 34인의 기자 및 평론가는 각자의 주관과 주장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와 영화인을 선정하고 자신들의 지지를 밝혔다. 그 결과, 한국영화 베스트에는 1위 <해변의 여인>을 비롯해 <가족의 탄생> <괴물> <망종> <시간>이 올랐다. 해외영화 부문에서는 리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간발의 차이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누르고 1위에 올랐다. 올해의 영화인 부문에서는 <해변의 여인>과 <괴물>이 두각을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신설 코너인 올해의 신인감독으로는 <피터팬의 공식>의 조창호 감독이 선정됐다. 한해 동안 <씨네21>이 사랑하고 아낀 영화와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 이 자리에 모두 모였다. 함께 즐기며 한해를 돌아보기를.

1위 <해변의 여인>

더 넓고 깊어진 미학의 우물

2006년 올해의 영화 1위는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다. <극장전>은 동시대 영화미학이 해낼 수 있는 어떤 최선인 듯했는데, <해변의 여인>은 그 예상을 깨고 또 한발 나가며 홍상수 영화 세계가 변화와 진전을 쉼없이 거듭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극장전>에서 일종의 ‘움직이는 프레임’을 처음 선보이며 시각장의 새로운 경험을 요구했던 그의 영화는 <해변의 여인>에 들어서 영화적으로 마치 숨을 쉬는 듯한 ‘유기체로서의 영화’에 더욱더 가까워지는 면모를 갖췄다. 일상에 대한 예리한 필치로 각광받았던 초반 작품들에 비해 심리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인상이 훨씬 짙어진 것 또한 특징이다.

평자들 역시 <해변의 여인>의 변화된 지점에 주목했다. <해변의 여인>에서 “중요한 변화는 시간의 확장이다. <해변의 여인>이 굳이 다루고 있다면 그래도 진전하는 시간”(허문영)이라는 평은 홍상수 세계의 시간성이 이 영화를 통해 훨씬 큰 진폭을 갖게 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는 “한국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새로운 경지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극장전>보다 이 재미는 훨씬 더 명료해졌다”(김소영)는 평은 유기체적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의 명쾌한 반응이다.

<해변의 여인>의 영화적 아름다움은 올해의 촬영감독으로 뽑힌 김형구라는 든든한 동조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올해의 신인 여배우로 뽑힌 고현정과 연기의 결을 살려내며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 김승우, 송선미,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지지자 김태우 등이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앙상블을 지휘해낸 것은 역시 구체와 관념 사이에서 기민한 감각으로 호흡하는 홍상수 감독의 조율과 연출 능력이다. <해변의 여인>이 올해 1위에 오른 것은 홍상수 영화가 품고 있는 미학의 우물이 얼마나 넓고 깊은 것인가에 대한 동의 내지는 확인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홍상수 감독 수상소감

“고현정의 신인배우 수상이 더 기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2년 연속 올해의 영화 1위 자리를 같은 감독의 영화가 차지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우선 그건 “1년에 한편씩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홍상수 감독의 계획이 실현됐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짧아진 구상과 작업기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력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더 참신해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2005년 <극장전>에 이어 2년 연속 수상인 걸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너털웃음으로 넘겨버리던 홍상수 감독은 “같이 작업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느끼며, 이 영화를 선정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며 올해의 수상소감을 밝혔다. 동시에 <해변의 여인>은 “아마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하고 싶었던 영화를 만든 것”일 거라고 설명했다. <극장전>이 1위에 올랐어도 같이 작업했던 배우들의 수상 소식부터 먼저 물었던 것처럼, 홍 감독은 이번에도 여주인공 역 문숙을 연기했던 고현정이 신인 여배우에 선정된 것에 더 기뻐했다. “(고현정은) 너무나, 너무나 훌륭한 배우”라며 “같이 작업하게 돼서 기쁘고, 수상하게 된 것도 기쁘다”며 짧고 굵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홍상수 감독은 현재 “제작사 청어람과 같이 하기로 했고, 12월 말까지 줄거리를 잡은 다음, 내년 1월 말까지 트리트먼트를 마칠 생각이다. 그러면 내년 6월 초쯤에는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차기작 계획을 밝혔다.

2위 <가족의 탄생>

결이 고운 한국영화의 탄생

올해 가장 놀라운 한국영화의 탄생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의 탄생>이다. 홀로 만든, 첫 번째 장편 극영화에서 김태용 감독은 유감없이 솜씨를 발휘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큰 환호를 받으며 <가족의 탄생>은 2위 자리에 올랐다. 이 영화의 지지자들은 올해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결이 고운 영화라는 점에 많은 응원을 보냈다.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가 에피소드별로 다소 편차가 있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들과 그들을 연기하는 놀라운 배우들, 그리고 그것을 끌어내 이야기로 묶어낸 연출자의 역량이 보기 좋게 합을 이룬 작품이라는 것이 중평이다.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켰다”(이현경), “‘관계의 윤리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안시환) 등의 찬사는 이 영화가 접근한 새로운 가계 형성의 방법에 동의하는 말들이다. “은근하면서도 도발적이고, 날이 서 있으면서도 포근한 영화”(김봉석)라는 <가족의 탄생>의 생김새를 정확히 짚어주는 평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영화의 만듦새에 비해 관객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 불운의 수작으로 남았지만, 적어도 김태용이라는 감독은 <가족의 탄생>을 통해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감독들의 명단에 올해 이름을 올린 것이 확실하다.

3위 <괴물>

대중성과 작품성의 화해를 입증한 저력

<괴물>의 해였다. 처음에는 사실 반신반의했다.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관객은 열광했고, 비평계는 호의를 보냈다. <괴물>은 영화의 완성도를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종전의 <왕의 남자>를 밀어내고 1300만명 고지를 넘어 한국영화 역사상 흥행 1위라는 대기록까지 달성하는 놀라운 이중의 성과를 냈다. 한국영화에서 다들 기피해오던 괴물 장르영화를 소재로, 그것도 한국식으로 혹은 봉준호식의 정치적 상상력으로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기술적 측면도 한 단계 더 발전했다. 할리우드의 리메이크 확정으로 이어진 것이 그러고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괴물>은 무엇보다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성있는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입증한 사례가 된 셈이다. 혹은 비전형적이고 불균질적인 장르영화로 흥행의 페이지를 새로 쓰게 된 불가사의한 주인공으로 남게 됐다. “풍성하고 날카롭고 영리하다. 괴력!”(박평식), “밉지 않은 유머와 위트, 소수적인 것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유연하지만 깊이있는 정치적 감수성과 세계관”(변성찬) 등은 <괴물>의 놀라운 이중의 저력에 보내는 수많은 지지 중 대표 격이다.

4위 <망종>

침묵과 폐허의 스펙터클

“장률 영화에서 모든 사람들은 더이상 침묵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을 때에만 말한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공간들은 마치 세트장에 온 것처럼 황량하다. 거기에는 어떤 삶의 흔적도 묻어나지 않는다”(정성일), “<망종>은 마치 사막에서 찍은 영화처럼 고독하고 쓸쓸하다. 여기 비하면 지아장커의 영화조차 화사해 보일 지경이다. 역설적이지만 <망종>에선 바로 이 텅 빈 공간이 스펙터클이다. 인물 내면의 풍경이 그들의 표정이 아니라 그들의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장률은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남동철). <망종>은 형언하기 힘든 폐허감으로 가득 찬 영화다. 간략하지만 힘있는 이미지로 둘러싸인 그 비극적 구조의 면밀함은 폐허의 공기를 끝내 사유하도록 이끈다. 30대 조선족 여자 순희의 싸늘한 이야기 혹은 절멸로 치달아도 눈물 한 방울 없는 이 메마른 이야기는 확실히 전작 <당시>보다 더 차갑고 깊어졌다. 뚝심있는 영화적 고집과 자기만의 형식적 돌파로서 완성된 <망종>은 상업적 지층 위에서 보호받으며 만들어진 그러나 유약함으로 가득 찬 국내파 영화들을 부끄럽게 만들 만하다. <망종>은 영화의 처음을 생각하게 하는 근본의 영화다.

5위 <시간>

김기덕의 화법은 진화하고 있다

김기덕의 작품 행보는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다. 언론에 던진 의사 표현이 빌미가 되어 영화가 아닌 언행으로서 도마에 오르긴 했으나, <시간>은 그와 상관없이 김기덕의 현재를 긍정할 만한 수작이다. “타자의 욕망에 매몰된 히스테리적 사랑을 처절히 사유하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근대적인 (직선적) 시간관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남다은), “김기덕 감독의 화법이 성숙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그의 작품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게 만든 작품”(김지미) 등의 평이 쏟아졌다. <빈 집> 이후 <활>에서 다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았던 김기덕이지만, <시간>으로 그는 다시 한번 약진하며 무궁무진한 영화적 파괴력의 소유자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시간>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하기 힘든 영역에서 이야기를 풀고, 그 누구도 쉽게 규정하기 힘든 방식의 감성을 끌어당겨 영화를 맺는다. <시간>은 그의 영화적 상상력이 사회적 이슈와 닿으면서 기이한 사랑의 숨바꼭질로 그려진 영화다. 김기덕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차지할 만한 <시간>은 그의 다음 영화 <숨>을 더욱더 기괴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할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2006년 외화 베스트5

리안과 켄 로치가 준 감동

올해의 외화 1위는 리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차지했다. 끝까지 선두를 놓고 경쟁을 벌인 것은 좌파 영화의 수장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할리우드의 괴상한 거주자 리안은 백인들조차 손대지 못했던 카우보이들의 사랑을 절절한 감동으로 표현해냈다.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작품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올해 외국영화 중 최고의 자리에 올렸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2위에 오른 것은 거의 켄 로치에 대한 존경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켄 로치의 최고작은 아닐지라도, 그의 영화가 지닌 육중하고 절대적인 무게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들이 반영된 듯하다. 켄 로치는 한편의 영화로 평가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3위는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다. 아마도 올해 만들어진 영화 중 형식적으로 가장 앞서나간 작품일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여기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살 사건을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풀어낸 구스 반 산트의 영화적 창조력이 빛을 발한 영화다. 4위는 에릭 쿠의 <내 곁에 있어줘>가 차지했다. 에릭 쿠의 장편 전작 두편이 가능성을 갖고 있는 정도였다면, 이 영화는 실제와 허구 사이를 감동으로 잇는 여러 개의 명장면을 연출해내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5위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와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이다. 다르덴 형제와 하네케의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이 두 영화를 같은 위치에 올려놓은 듯 보인다.

순위
1. <브로크백 마운틴>
2.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3. <라스트 데이즈>
4. <내 곁에 있어줘>
5. <더 차일드> <히든>

guilty pleasure?

유치하다 비난해도 괜찮아

올해 새로 신설된 설문이 guilty pleasure다. 진지한 영화적 평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는 개인적 취향때문에 좋아하는 나만의 영화. 이런 걸 듣는 재미를 놓칠 수야 없지 않나. 모아놓고 보니 거의 충격의 도가니다. 동시대 가장 뜨거운 필력의 평론가인 정성일은 지아장커의 <삼협호인>에 “나의 올해의 영화!”라며 짧고도 굵은 진심의 혈서를 쓴다. 더러는 그 반대의 ‘그냥’ 유형도 있다. 평소의 그 예리한 평론적 언어를 뒤로한 채, <국경의 남쪽>에 보내는 평론가 허문영의 이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애정 고백. “조이진이 연기한 연화가 그냥 좋다.” 혹은 통찰력 깊기로 소문난 영화학자 김소영이 <에이트 빌로우>에 보내는 낯 뜨거운 발랄버전 예찬론은 또 어떤가. “영화의 완성도와 전혀 관계없는 참을 수 없는 즐거움, 허스키 족, 특히 스마트견 마야의 밧줄 구조작전은 숨을 멈추게 한다. 허스키, 말라뮤트! 탈빙하시대를 넘어 영원하라!” 이뿐만이 아니다. 여성의 이슈에 민감한 평론가 남다은이 남성들의 우직한 땀의 영화 <짝패>에 대해 “입 벌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고 말하고야 마는 충격 고백. 혹은 성실하고 단단한 사유의 영화평론가 김지미가 “영화 보는 내내 숨죽이고 낄낄거렸지만, 그 누구에게도 권할 수 없었던 작품”이라며 정신없이 헷갈리는 영화 <다세포 소녀>를 끌어안는 코믹한 상황. 그리고 이것저것 투덜대기로 유명한 투덜양 김은형은 투덜대기는커녕 이 영화를 “싫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뭐 켕기는 거 있는가봐?’라고 갈구고 싶다”며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적들에게 한방 먹인다. 자, 여기까지 읽은 독자 여러분, 전문평자들도 이럴진대, 까짓 거 뭐 어떤가. 올해 당신의 guilty pleasure는 무엇인가. 이제 그만 부끄러워하고, 뻔뻔하고 시원하게 한번 털어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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