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첫 장면은 인종차별이 팽배한 60년대 보스턴을 찍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설리반의 시체가 놓인 아파트 베란다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쥐로 끝난다. 인종차별과 ‘쥐새끼’, 이 영화의 두 가지 모티브는 서로 얽혀 있다.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냉소적으로.
<갱스 오브 뉴욕>에서 이미 아일랜드인들의 핏빛 정착기를 그렸던 마틴 스코시즈는 이 영화로 그 아일랜드인들의 현재를 그린다. 20세기 초 뉴욕이나 21세기 보스턴이나 이들이 갈 곳 없기는 마찬가지다. 백인 학교에 가지 못하는 흑인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다(‘하얀 흑인’으로서의 아이리시). 살아내긴 해야 하지만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을 때 서로 모여 갱이 되는 일은 가장 쉬운 길이다. 차별받는 흑인과 아일랜드인이 갱단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코스텔로의 독백처럼 “환경이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갱(설리반의 선택)이 싫을 때, 정반대로 자신을 차별하는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상징적 방식은 경찰이 되는 길이다(코스티건의 선택). 경찰이면서 갱이고, 갱이면서 경찰이고,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코스티건과 설리반의 조합은 그래서 차별받는 종족이 택할 수 있는 이항대립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깔끔하게 나뉠 수 없는 질곡을 함께 보여준다. 코스티건과 설리반은 그래서 동전의 양면이다. 같은 마을에서 자라, 같은 경찰학교를 나와, 같은 보스턴 특별수사대에 배치된다. 단적으로 그 둘은 아버지를 공유한다. 코스티건의 ‘갱’ 아버지 코스텔로는 설리반의 아버지이기도 하고(실제로 설리반은 코스텔로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경찰에서 설리반의 관리자 퀴건은 코스티건을 갱단에 심은 자이자 그가 유일하게 위험을 토로할 수 있는 상징적 아버지다.
인종차별이라는 덫 안에서 갱 아니면 경찰을 선택하는 것이 살아내기의 전략이라면, 그 전략 속에서 성공하기 위한 유일한 전술은 ‘쥐새끼’가 되는 것이다.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할 때의 그 쥐새끼, 염탐자이자 스파이. 코스티건은 갱 속에 들어가는 ‘쥐새끼’가 되지 못하면 경찰이 될 수 없고, 설리반이 ‘쥐새끼’가 되지 않았다면 경찰 내에서 고속 승진을 할 수가 없다. 가족사를 캐며 그를 모욕하는 디그냄 형사에게 코스티건은 “미국에서 가족은 항상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법”이라면서 호손을 인용하지만(코스티건이 달고 다니는 가족이라는 ‘주홍글자’!), 디그냄은 “제길, 셰익스피어는 모르나?”라고 하며 빈정댄다. 사실 이 영화에는 호손보다는 셰익스피어가 더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정체성을 감추며 사건을 풀어가는 인물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령 모든 인물들이 자신을 감추고 쥐새끼처럼 서로를 엿듣는 <햄릿> 3막4장에서 오필리어의 아버지이자 왕의 조언자인 폴로니어스는 왕비의 방에 숨어 햄릿의 말을 엿듣다가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쥐새끼냐? 죽어버려라”고 외치며 폴로니어스를 찌르는 햄릿. ‘쥐새끼’의 최후는 흔히 이렇다. 코스티건 역시 설리반처럼 ‘쥐새끼’ 역할이지만 그에게는 ‘정체성 찾기’라는 ‘진지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속물 설리반이 진짜 ‘쥐새끼’로 그려진다. 마지막 장면의 쥐는 정확히 설리반의 은유다.
이들은 왜 ‘쥐새끼’의 역할을 감수하는가? 욕망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코스티건은 수치스러운 가족사를 뛰어넘기를, 설리반은 가난을 뛰어넘어 성공을 열망한다. 예컨대 코스티건은 퀴건의 집에서 가족 사진을 유심히 보고, 설리반은 주 의사당이 보이는 고급 아파트를 얻는다. 불행하게도, 코스티건은 훈장을 받았으나 대가 끊겼고, 설리반은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믿은 순간에 죽는다. 이들의 운명은 가지지 못했으나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가지기 위해서는 ‘쥐새끼’가 되어야 하고, 바로 그 때문에 죽어야 하는 운명. 그것은 최악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가장 차별받는 인종의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첫 장면의 인종차별 다큐멘터리와 마지막 장면의 쥐새끼는 이렇게 결합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최악의 인물은 코스티건과 설리반이 아니라, 이들을 쥐새끼로 만든 퀴넌과 코스텔로다. 권력을 쥔 채 삶(정체성) 전체를 파는 것을 대가로 거래를 하는 이들이다. 육체노동을 넘어서 우리 삶 전체가 자본주의에 이용되는 ‘삶-정치’(biopolitics)의 시대를 맞은 우리에게 코스티건과 설리반의 모습은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의 모습이고, 퀴넌과 코스텔로는 이들의 ‘삶’을 빨아 ‘정치’를 하려는 자본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허무한 것은 이들 모두가 다 죽어버린다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 시작한 영화는 냉소적으로 끝난다. 역시 이 영화에는 호손보다는 셰익스피어가 더 어울린다. 모두 다 죽어버리고, “남은 것은 침묵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