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변성찬·정한석·남다은의 비평에 대한 반론
2007-01-04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망상을 망상으로 내버려두라

582호에 세 평자들의 글이 실렸다. 변성찬은 ‘세계를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통한 복수’를 그린 색다른 복수극으로 읽으면서, 갈등이 폭발하지 않음을 아쉬워한다. 정한석은 착각과 착란이 빚어내는 뮤지컬로 읽으면서,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공존시키며 판단을 유보시키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상, 이 영화는 긴장이 느슨하고 판단은 원인 무효화되었다고 비판한다. 남다은은 사이보그지만 왜 괜찮은지 알 수 없으며, 행위와 원인이 누락되어버린 상태에서 사이보그, 거식증, 존재의 목적 등 의미심장한 기표들만 전시될 뿐이라며 일축한다. 또 사랑이나 칠거지악의 역설을 통해 ‘순수한 세계’로 복귀하려는 감독의 욕망은 퇴행이며, 망상을 인정하는 사랑의 윤리가 옳은지 반문한다. 나는 이들의 평가(특히 남다은의 의견)에 반대하며 이 영화의 함의를 밝히고자 한다.

1. 왜 사이보그이며,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가?

변성찬은 영군(임수정)이 사이보그 망상을 갖게 된 것은 이미 할머니가 쥐-사이보그였기 때문이라 해석했지만, 그녀의 사이보그 망상은 그녀가 공장 조립공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쥐로, 혹은 사이보그로 생각하는 것은 일단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왜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는가? 나를 둘러싼 이 ‘인간’들이 도저히 나와 같은 종류라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이질감으로 괴로울 때, 주체는 돌파구를 찾는다. 같은 인간이라면, ‘왜 이들과 나는 이토록 다를까?’ 생각하다가, 이들은 나와 원래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이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구나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질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인간이 아닌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굳이 책임을 묻자면 나한테 원인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인간으로 알고 있는 인간 세상에서 가급적 티를 내지 않고 살아야지, 마음먹는다.

그런데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 대체 뭘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나와 관계맺고 있는 것 중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에 동일시된다. 부엌데기 할머니는 시집에서 인간 취급을 못 받았을 수 있다. 며느리를 쥐 잡듯 하는 시어머니의 행동이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 부엌에서 마주치는 쥐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쌀이나 축내고 병균이나 옮긴다는 쥐, 그래서 나타나면 부지깽이로 때려 죽여야 하는 쥐, 하지만 쥐들도 살겠다는 의지로 눈이 초롱초롱하지 않은가? 할머니는 자신이 쥐라고 생각함으로써 불가해한 느낌들이 해소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쥐 행동은 주위와 다시 불화하고 할머니는 잡혀간다. 영군도 할머니를 잡아간 엄마와 하얀 맨들이 도저히 자기와 같은 존재라고 믿을 수 없어,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꾀한다. 인간이 아니면 뭘까? 그녀는 공장라인의 기계부속으로 존재하는 여공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기계(생산라인, 라디오, 자전거 등)와 동일시하여 자신을 사이보그라 생각한다(그녀의 사이보그 되기는 내적 필연성을 지니기 때문에,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과 무관하다는 이유로 ‘기의없는 기표’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해선 안 된다).

그러나 그녀의 망상은 그녀의 존재 근거를 위협한다. 쥐는 생물체라 무라도 먹지만, 기계는 인간과 에너지 활용이 달라서 밥을 먹을 수 없다. 그녀의 거식증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 <301·302>에 나오는 거식증과는 다르다. 이들 거식증은 식욕과 성욕을 지닌 자신의 육체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신경증적 거식증이다. 그녀들에겐 망상이 없으며, 자신의 욕망과 육체성을 수긍하게끔 하여 밥을 먹게 하는 게 치료이다. 그러나 영군은 자신의 욕망과 육체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적극 받아들인다. 다만 다르게 이해(망상)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치료는 망상을 없애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망상은 그녀의 내적 모순의 산물이자, ‘욕망하는 기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망상은 없어지지도 않지만, 없애면 이청준 소설 <조만득씨>의 경우처럼 환자의 삶이 파괴된다. 영군의 망상을 추인하면서, 존재의 근거를 유지시켜나가게끔 하는 것, 바로 ‘밥은 먹게끔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치료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명제는 대사 그대로 ‘사이보그이지만 밥먹어도 괜찮다’는 뜻이지, 남다은의 오독처럼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망상이 괜찮다’거나, ‘사이보그이지만 사랑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데, 영화의 주제가 여기(밥먹이기)에 있기 때문이다. 생물-기계의 ‘존재 목적’은 생명 유지이며, 인간은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

망상은 그대로인데, 밥만 먹이는 것이 치유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남다은은 거짓으로 상태를 유지시키는 사랑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 정신병에 대한 오해가 숨어 있다.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환자의 잘못된 정신을 뜯어고쳐 옳은 사고를 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다(누가 누구의 정신상태를 모조리 검열하여 그들 중 그릇된 망상을 가진 자를 색출하고 어떤 올바른 사고를 주입한단 말인가?). 정신병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차피 누군가의 ‘행동’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삶을 심각하게 해칠 때이다. 그때 그 ‘행동’을 수정하여 다른 사람들과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다. ‘그게 뭐냐?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지’라는 반문은 푸코가 지적했듯 광기를 임상의학적 분류를 통해 증상과 병인론(病因論)으로 체계화하고 실체화할 수 있다는 오해에 기초해 있다.

영화는 이러한 병인론적 구술, 즉 오이디푸스적 병인 캐기가 무망한 노릇이라는 것을 서두에 밝힌다. 그럴 듯한 정신분석학적 알리바이들이 모두 작화증 환자의 ‘증상’이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정신병에 대한 인식이 프로이트 학설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 영군의 어머니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녀는 “괜찮아. 몸 이상한 데는 없고? 남들 모르게만 하면 돼”라고 말하며, 무가 아닌 순대를 받아먹자 안심한다. 유난히 전치(轉置)나 말실수가 잦은 그녀도 망상을 지닌 것 같지만, 그녀의 망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망상이 무엇이든 주위와 나름 조화를 이루며 살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병은 병인이 아니라 증상의 문제이고, 그 증상이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찰을 일으키는 사회적 환경과 관계가 있다. 박찬욱의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서 한국어를 떠듬거리는 네팔인 이주노동자가 정신병원에 수년간 감금되어 있던 것도 같은 이치이다.

2. ‘훔치심’을 지닌 이, 그는 누구인가?

일순(정지훈)은 소멸될 것이 두려워 훔치는 안티-소셜(반사회성 인격장애)에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그는 남의 것으로 자신의 공허를 메우려 한다지만, 그의 ‘훔치심’이 단지 결핍의 발로로 여겨지진 않는다. 그는 다른 이의 특성을 훔쳐 전유(專有)하는데, 그 과정은 최면현상과 흡사하다. 그는 모든 이의 특성을 한번씩 전유해봄으로써 (자기 식대로) 모든 이가 되어 보는데, 대단한 욕망과 내공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가장 자부하던 탁구 실력을 도둑맞은 이는 낙심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신경증 환자는 억압이 풀려 무례해지는 경험을 한 뒤, 다시 특성들을 돌려받는다. 그들이 특성을 잃는 것은 최면효과라 치더라도, 일순이 특성을 재현하는 능력을 어찌 설명해야 될까? 그에겐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말랑말랑한데, 이는 대표적인 정신분열증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의 분열증은 임상(의학)적 분열증이라기보다는 들뢰즈가 말하는 ‘해방으로서의 분열증’에 가깝다.

그가 안티-소셜이라는 건 일종의 역설이다. 그는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을 언어화되지 않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는데, 그것이 사회의 상징질서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안티-소셜하지만, 접속의 능력으로 보자면 울트라-소셜하다.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타인을 관찰하여 핵심적인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기꺼이 자기 것으로 삼아 직접 타인을 체험한다. 그의 자아는 비어 있으며(空) 타인의 것으로 자기를 채운다. 무한한 잠재성을 지닌 그의 ‘타인-되기’. 그는 틀니를 훔쳐 그녀의 행동을 따라하다가 돌려준다. 그녀의 부탁으로 동정심을 훔친 뒤 그녀의 발작을 본다. 그녀를 동정하게 된 그는 비행양말의 환상과 요들송을 선사하고, 두 번째 발작 상태에서 그녀의 망상을 함께 본다. 그는 그녀의 총격망상에서 자신이 작아지는 망상을 함께 겪는다. 망상의 공명. 그는 작아진 채로 작화증 환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앙상한 그녀 몸에 어머니 유품을 (거짓으로) 장착한다. 그녀가 처음 밥을 먹을 때, 그는 (그녀의 믿음대로) 그녀 몸속에서 어머니 유품이 작동되는 것을 본다.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 그녀에 대한 동정심으로 대치되었음을 스스로 느끼는 장면이다. 그는 어머니 유품을 영군 할머니 유품에 합장하며 과거의 상처와 작별한다. 그의 결핍이 그녀의 망상과 합체되고 그녀를 살림으로써 그의 공허감 역시 자가-치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그녀가 해독해낸 존재의 목적(10억 볼트 충전)을 구현코자 함께 번개를 맞으러 가 그녀와 맨몸으로 껴안는다. 합일의 열락이자 충전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뜬다.

이러한 멜로의 과정을 환상에 의한 갈등의 봉인(변성찬)이나 판단의 원인 무효화(정한석), 근본적인 치유를 도외시한 기만(남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엔딩(정성일, 583호 ‘편집위원 3인의 대담’)이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는 모두 영화에 과도한 은유를 덮어씌웠을 때 가능한 해석들이다. 물론 영화가 다소 산만하고 은유의 미끼를 무수히 던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핵심을 추려보면 멜로적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해피엔딩에 도달했을 뿐이다. 오히려 영화의 정치성은 매우 진보적이다. 왜냐하면 지독히 다른 타자(가령 망상증 환자)와의 공존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상의 배후를 캐거나 틀니를 빼앗고 격리시키는 등의 파시즘적 작태를 집어치우고, 현실과 환상, 정상과 비정상을 구획짓는 강박에서 벗어나,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되 동정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가령 밥먹기)를 챙겨주자는 것이다. 타자를 분석하거나 교정하는 대신 돌봄의 윤리를 갖자는 것, 과연 이보다 더한 ‘진보’가 어디 있으랴? 아는 것,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밥먹는 것이라는 말, 이것이 내가 믿는 삶의 윤리이자 민생정치이다. “희망을 버려!” 이는 비관이 아니라 거대한 현실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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