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용어 중에 ‘코미디 릴리프’(comedy relief)란 말이 있다. 영화 속에 코믹한 장면을 삽입해 극의 긴장을 늦추는 것이다. 팽팽했던 이야기는 웃음에 진동하고, 작은 쉼표가 파장의 뒤를 잇는다. 숨죽였던 장면들이 안도(relief)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영화는 가벼운 사유의 시간을 갖는다.
고소영이 코미디를 들고 나타났다. 도도하고 섹시하며 당당했던 그녀가 복고 냄새가 진동하는 핑크색 가죽재킷을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 있다. 거침없이 내뱉은 대사는 <언니가 간다>다. 우연한 기회에 12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30살 싱글녀의 이야기. 비현실적인 설정과 덤벙거리는 캐릭터가 왠지 고소영에겐 이물감처럼 낯설다고 생각했다.
“어색했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저는 스쿠터도 탈 줄 알거든요. 또 편한 사람들을 만나면 춤도 추고, 코믹한 노래를 부르러 가기도 해요. 물론 깐깐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저의 다른 면도 이젠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하이톤의 차가운 어투 대신, (본인의 표현대로) “찡얼거리는” 베이비 톤으로 대답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집에서 뒹구는 것”을 즐기며, 텔레비전을 하도 많이 봐서 “테순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집에서는 종종 갈비찜,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만든다고 한다. 이쯤 되니 고소영이란 팽팽한 이미지도 진동하기 시작한다.
<언니가 간다>는 과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이야기다. 고소영이 연기한 나정주는 ‘고삘 때’ 실패한 첫사랑을 수정하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는 여자. 하지만 결과는 실패,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후회는 해요. 하지만 정주는 후회하지 않거든요. 첫사랑의 상처는 아프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고 말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12년 전을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게 왜 없겠어요? 하지만 그건 지금 바꿀 수 없는 거잖아요. 저는 우스갯소리로 ‘나는 72년생이 아니야, 72년에 태어난 기억이 없어, 엄마가 72년이라고 하니까 그냥 그런 거야’라고 해요.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인 거죠. 세월은 흐르고, 누구나 나이는 먹고,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요.” 그렇게 고소영은 긴장을 놓았다. 자신의 12년 전과 마주하는 영화에서 그녀는 불편함을 덜어내고 추억을 즐긴다. 그녀의 표현대로 ‘생목소리’는 웃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감독님이 제 목소리가 다르대요. <아파트>에선 ‘천. 삼백. 이십. 사호(웃음),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근데 이번 영화에선 많이 편하게 한 것 같아요. 그냥 친구들 만나면서 수다 떠는 것처럼.”
4년에서 6개월. 올해 7월, 긴 공백기 끝에 <아파트>로 돌아왔던 그녀는 템포를 한껏 높여 보인다. “다작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젠 일년에 한편 정도는 하고 싶어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4년이란 시간이 아깝기도 하거든요. 더 좋은 작품, 더 많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근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쉼표 다음엔 다시 팽팽한 긴장일까. 모든 일을 사전에 계획하고, 철두철미하게 진행한다는 그녀는 “예전에 안병기 감독님이 농담처럼 말씀하신 <원초적 본능> 같은 영화, 혹은 박찬욱, 허진호 감독님과의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이번엔 귀여운 영화 했으니까, 다음엔 좀 멋있는 걸 하려고요”라고 가볍게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코미디는 진심을 실어 나른다고 하지 않던가. 확실히 ‘언니’의 출발은 다시 시작된 것 같다.
12년 전의 나 과거를 심각하게 돌아보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제가 성격이 급하거든요. 옷을 샀는데 후회가 되면, 바로 다음날 가서 바꾸든지 해요. 뭐든지 빨리 해결하는 게 좋아요.
12년 뒤의 나 12년 뒤요? 생각하기 싫다. (웃음) 아기도 하나 있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 같은데요. 아직은 연기를 평생직업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한데 맞는 역할이 주어진다면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장만옥이나 공리, 참 멋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