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서구에서 마스무라 야스조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평론가일 조너선 로젠봄은 마스무라를 두고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구는 마스무라보다 조금 앞선 세대이면서 그와 어떤 관심사들을 공유했던 영화감독 이치가와 곤에게 적용해도 무방할 것 같다. <버마의 하프>(1956) 같은 영화들로 꽤 일찍 서구에 소개되긴 했어도 이치가와 역시 마스무라와 다르지 않게 그 튼실한 작품 세계에 비해 ‘적극적인’ 조명과 평가의 영역 내로 진입했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1월4일부터 21일까지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열리는 ‘이치가와 곤 & 마스무라 야스조 특별전’은 이 두 일본 영화감독의 잘 드러나지 않은 진가를 확인케 하는 자리이다.
“내게 단일한 주제 같은 것은 없다. 난 그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 뿐이다.” 이치가와 스스로 그렇게 말한 바 있듯이 그는 하나의 관심사에 얽매이지 않고 코미디, 시대극, 탐정물,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그 영화들 안에서 그의 인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닌데, 그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는 거리를 두고서 침착하게 분석하는 듯한 태도로 지켜보는 곤충학자의 시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치가와는 종종 클로드 샤브롤과 유사한 영화감독이라고 이야기되곤 한다(게다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면에서도 둘은 닮은 데가 있다). 그렇게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아이러니를 끌어들이는 다분히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그는 전후 일본사회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았고 일본의 전통과 제도, 순응주의를 문제 삼았다. 이치가와는 휴머니즘적인 사회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영화감독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런 면모는 특출한 시각적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치가와는 자신의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월트 디즈니라고 말하고 자신은 화가로서의 교육을 받았고 여전히 화가라고 생각한다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스무라 야스조의 말을 빌리자면,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이미지들만을 가지고 허구적 내러티브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다. 구성에의 감식안, 지독한 완벽주의, 미적인 것에 대담하게 몰두하는 태도, 이치가와는 이 모두를 화면 안에 쏟아넣었다. <유키노조의 복수>(1963)는 그런 노력의 최대치가 일본 영화사상 가장 황홀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영화를 낳은 실례일 것이다.
이치가와 밑에서 조감독 일을 하기도 했던 마스무라는 예컨대 일본사회의 비인간적인 측면들을 어두운 비전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선배감독과 공통의 지점에 서 있었다. 한편으로 그 역시 완벽한 화면을 만드는 데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죽기 직전 마스무라가 이치가와에 대해 쓴 ‘이치가와 곤의 연출법’에서도 미묘하게 드러나 있듯이, 이치가와에 대한 태도는 존경과 반감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마스무라는 “감수성과 테크닉이 예술이고 사유의 형식”이라고 하는 이치가와의 방법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마스무라는 ‘무색’의 일본영화를 비판하는 데에 좀더 과감한 태도를 보여줬다. 그는 영화 속에서 개인주의의 관념을 밀어붙임으로써 오시마 나기사가 부른 바 ‘일본영화의 근대주의자’가 되었다. 마스무라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표층 아래 숨어 있는 일본인들의 욕망을 끌어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좀더 활기차게 표현하기 위해 개성과 욕망을 광기로 치닫기까지 하며 추구하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 있어서도 마스무라는 내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는 고백한다>(1961), <남편은 보았다>(1964), <만지>(1964) 같은 그의 영화들은 관객의 눈과 마음 모두를 거의 폭발시키기 직전까지 몰고가는 강렬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