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양’에 쓸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나에게 <미녀는 괴로워>로 ‘존재 자체로 세상에 미안함을 느끼는 못생긴 인간들이 겪는 사회적 애정결핍’에 대한 통한의 육성고백을 써보라는 후배의 제안을 듣고 “재미있을 거 같지만 내가 못생긴 인간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말야”라고 시니컬하게 응답하니 다른 후배가 말한다. “이제부터 시작이잖아요.” 뭐가 시작이라는 거지? 미녀 끝, 추녀 시작이라는 말씀?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 시대의 개막은 이미 오래전 서서히 열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몇년 전 영화기자를 처음 할 무렵만 해도 나는 취재원들의 호의와 깍듯한 매너 속에서 ‘순수의 시대’를 살았다, 고 생각한다. 멍청한 질문을 해도 취재원들은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친절하게 답했으며 어디를 가도 중간에 가까운 자리가 나를 위해 마련되고 나의 술잔은 항상 모자람이 없도록 배려받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비워진 술잔이 채워지는 속도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술자리에서 한 제작자는 같이 온 후배 ‘두명’을 꼭 집어 “저 친구들은 외모가 기자 같지 않은데?”라며 칭찬인지 비난일지 모를- 뭐겠냐- 코멘트를 날리고, 또 다른 영화인은 나보다 나이 많은 동료 옆에서 “아니, 김은형 기자가 더 어리단 말야?”라고 뭐 대단한 비밀이나 알아냈다는 듯 호쾌하게 외쳐댔다. 슬픈 건 이런 주변의 냉담어린 무심함이 아니라 나의 반응이었다. 나는 어느새 “옆에 있는 맥주병 좀 건네주시겠어요?”라고 자주 말하는 것으로 나라는 존재가 이 술자리에 있다는 걸 알리는 데 부지런해졌고, “하하하(어색하게 큰 웃음), 쟤네들이 좀 뺀질하게 생겼죠”라고 말한 이는 원하지도 않은 추임새를 넣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으며, “하하(더이상 어색하지도 않다), 제가 좀 성숙해 보이잖아요”라고 궁색한 자기변명도 서슴지 않게 됐다.
알아서 눈치보고 알아서 망가져주며 알아서 비켜주는 게 원작 <미녀는 괴로워>에서 주인공 못생긴 칸나가 체득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성형수술로 미녀가 된 뒤에도 그런 습관을 못 버려서 자기 옆의 누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 ‘나 때문인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식당에 가면 알아서 화장실 옆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이 독자를 웃게 하고 어떤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나는 아니라니까).
그런데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원작과 반대로 간다. 아니 같은 길을 가는 척하다가 뒤에 가서 딴소리한다. 이 영화의 가장 센 코미디는 마지막에서 제니가 뚱뚱했지만 진실됐던 한나로 돌아가 다시 만든 앨범이다. 이름은 한나인데 얼굴은 제니다. 완벽하게 성형한 얼굴을 내세우면서 ‘역시 내면의 아름다움이 최고’라고 외치다니 이게 웬 4차원 코미디인가. 4차원 코미디를 하려던 게 아니라면 정말 성의없거나 정말 멍청한 결말이다. 이걸 쓰고 있는 내가 멍청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