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택의 욕실일까. 모델하우스를 연상케 하는 세련된 인테리어에 호화로운 월풀 욕조가 입을 벌리고 있다. 문가에서 발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한 소녀가 부리나케 뛰어든다. “나 못 참아!!! 화장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꾀죄죄 때가 묻어나는 소녀가 빙글빙글 돌며 비명을 지르자 문간에서 그을린듯 시커먼 얼굴의 노인이 나타난다. 강남의 한 호텔에 자리한 <방울토마토> 촬영현장. 부티나는 욕실에 등장한 빈티나는 두 불청객은 신구와 김향기다. “급해! 급해!” 김향기가 엉덩이를 손으로 꼭 틀어막은 채 깡총깡총 뛰어오르기 시작하자 스탭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 입을 다문다.
<방울토마토>는 칠순 노인 박구(신구)와 6살배기 손녀 다성(김향기)의 고단한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집이 철거당하면서 길가로 내몰린 두 사람은 우연히 개발업자 갑수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비밀스러운 셋방살이를 시작한다. 이날 촬영분은 부서진 리어카를 보상받기 위해 갑수 집을 찾은 박구와 다성이 관리인의 실수로 빈 저택에 발을 들이면서 벌어지는 장면. 허겁지겁 변기를 찾아 헤매던 할아버지와 손녀는 이내 월풀 욕조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목욕물을 접한 박구는 얼른 손녀를 씻기려 들지만, 물이 퐁퐁 뿜어져나오는 욕조에 신이 난 다성은 물장난에 여념이 없다. “할아버지, 구멍 봐봐!” “이년아, 할아버지 다 젖어, 그만해!!” 김향기의 재롱과 신구의 호통이 합창을 하는 양 척척 장단을 맞춘다.
“연기생활 40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며 화색을 묻어나는 신구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라며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삶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방울토마토>로 데뷔하는 정영배 감독은 드라마 <장희빈> 등을 연출하며 방송계에서 10년 넘게 경력을 쌓아온 인물. 그는 “희망조차 삶의 무게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며 연출의 변을 밝혔다. <방울토마토>는 오는 5월경 극장가를 찾을 예정이다.
<방울토마토>의 오정택 PD
“감독과의 3년 전 인연 다시 이어서 기쁘다”
“3년 전 <거리에 서다>라는 작품으로 정영배 감독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때는 여러 가지 사정이 악화되면서 영화를 접어야 했지만, <방울토마토>로 다시 함께 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무척이나 반갑고 기뻤다. 고향이 창원인데, 연기를 너무 하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혼자 상경해서 드라마 보조출연으로 일했다. 그러다 90년에 <라이방> 조명팀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는데, <아프리카>를 찍다가 몸을 다쳐 조명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만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오랜 고심 끝에 튜브엔터테인먼트에 지원했고, 운좋게도 제작부로 입사하게 됐다. <오! 브라더스> <분홍신> <가리베가스> 등의 작품을 해왔는데, 이제 연기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다. (웃음) 내겐 제작부 일이 천직인 것 같다. 스탭들과 함께 호흡해 땀 흘리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닭살 돋을 만큼의 스릴을 안겨준다고 할까. 나이가 많이 든 뒤에도 계속 현장에 서서 그 공기를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