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그곳 공원으로 산보를 갔더니 그야말로 참 해괴한 일이 많았다. 아는 남녀고 모르는 남녀고 모두 허리를 껴안고 무도를 한다. 키스를 한다. 별의별 야릇한 것을 다 한다. 처음 보는 나의 눈, 특히 동방예의지국 사람으로 자처하는 그때 나의 눈에는 그네들이 모두 광귀의 난무가 아니면 야만의 희극으로만 보였다. 그리하여 저것들도 소위 인류인가 하고 혼자 무한한 개탄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를 둘러본 이광수가 <별건곤>(1930년 1월1일)에 쓴 글 중 일부다. 스물셋 나이에 타국에서 처음 맛본 달콤쌉싸름한 경이를 어찌 쉽게 떨칠 수 있으리오. 인간 말종들이라 치부하고 돌아섰으나 그날 이후 매일 그 공원을 찾았다는 이광수. 아내에게 “옆구리를 한번 꼬집힐” 각오하고 이렇게 털어놓는다. “춤을 출 줄 알았으면 나도 같이 한번 추고 싶은 생각이 나고 정을 준다면 연애도 한번 하고 싶었다”라고.
그로부터 20여년. 1950년대 한국의 인민들은 금단(禁斷)의 키스를 자유롭게 나눴을까. 백주대낮은 몰라도, 주변이 으슥할라치면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라고 허심탄회하게 제안했을까. 어른이건 아이건 원조물자 받아 입에 풀칠하기 바쁜 시절인데, 어느 누가 공연히 키스해서 에너지를 낭비했겠느냐고? 모를 일이다. 키스가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는지, 제 손의 떡이었는지. 어쨌든 키스에 대한 관심만은 지대했던 모양이다. 키스방을 만들려다 무산된 미국 필라델피아의 시도(선구적 발상은 늘 실패하는 법이다), 2년 동안 사귀다가 용기내서 키스했는데 여자친구에게 고소당한 캐나다 토론토의 청년(짝사랑 도둑키스였나? 아님 테크닉 부족?), 떠들썩한 시장 한가운데서 키스를 나누다 쇠고랑을 찬 인도의 연인들(혹시 이교도끼리? 종교분쟁에 희생당한 사랑이여!)까지. 당시 주요 일간지 해외토픽은 ‘키스갈구 세계인민동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입 잘못 놀렸다가 패가망신한 사례들을 주로 소개한 걸 보면, 경거망동 말라는 암묵적인 협박 같기도 하다. 하고 싶으나 해선 안 될, 보고 싶으나 봐선 안 될 키스. 그러나 거스르지 못할 대세라는 게 있는 법이다. 성림(聖林, 할리우드)이나 구라파(歐羅巴, 유럽)영화만의 표식이었던 키스가 드디어 한국영화에서도 등장한다.
“흥행만을 노리고 풍기문란 (외화)포스터를 제작한” 극장들을 일제히 조사해 엄벌에 처하겠다는 경찰의 발표(1954년 11월15일 <서울신문>)가 나온 지 한달 뒤인 12월14일. 수도극장에서 개봉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은 대담하게 “침이 꼴깍 넘어가는” 5초가량의 입맞춤을 선보인다(말 그대로 입술을 부비는 정도다). 극중에서 남한 방첩대 대위 영철(이향)과 사랑에 빠진 북한의 첩보원이자 바 걸인 마가렛(윤인자)은 “저를 선생님 손으로 보내주세요”라며 애원하고 죽음과 키스를 맞바꾼다.
<운명의 손>은 허술한 극적 구성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5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밀려” 롱런을 기록하지 못했으나 고무신 신은 중년 부인들의 호기심은 키스장면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다. 당시 미술팀으로 일했던 노인택씨는 “외화랑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어요. 중년 부인들은 키스를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하고. 입소문들이 나서 많이 봤다고 해요. 게다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많았으니까. 나중엔 다방마담 하면 간첩으로 몰린다더라. 김일성한테 용돈 타서 쓰는 것 아니냐고 그랬으니까”라고 말한다. 최초의 키스장면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 등장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분석들도 있다. “자유로운 성문화와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무장한 미군 문화가 대거 유입되었고, 이 문화의 최첨단에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키스장면은 당시의 혼란 속에서 급변하던 성문화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엄격한 유교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윤인자는 화려하고 도발적이었던 마가렛 역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한국영상자료원)
키스의 역사를 연 당사자들의 고충은 그러나 적지 않았다. “저 키스장면 했다가 이혼할 뻔했어. (남편이) 막 펄펄 뛰고 사무실에 가서 난리를 치고 그래서. 그 사무실은 좋다구나 하고서 신문에 내고.” 영화 개봉 직후 윤인자는 한 인터뷰에서 ‘애정문제’보다 ‘영화예술’이 우선하는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지만 감독을 고소하겠다며 길길이 화내는 남편과의 불화에 적지 않게 시달렸을 것이다. 배우만 곤란했던 것은 아니다. 제작진 또한 키스장면 촬영 직전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스탭 중엔 “간첩과 키스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촬영이 결정된 뒤에는 윤인자의 남편을 세트로 데려와 그의 입회하에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두 배우의 입술에는 ‘부적절한 감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셀룰로이드 재질의 비닐을 입혔다는 말도 있다. 한형모 감독 또한 검열을 우려해 디졸브를 하거나 사물을 앞에 두고 걸쳐 찍기도 하는 등 대체 버전을 마련해야 했다. 개봉 뒤에 윤인자의 남편이 그처럼 분노했던 건 자신이 촬영장에서 봤던 장면과 실제 영화 속 장면이 달라서일지도 모른다.
“앞으론 이것이(<운명의 손>) 계기가 되어 (한국영화에도) 주연남녀배우들의 키스장면이 빈번해질 것이 기대된다.” 1954년 12월26일 <한국일보> 기사처럼 스크린에서 키스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이후 많아졌다. 동시에 키스를 둘러싼 충무로 가십들도 쏟아져나왔다. <운명의 손>에서 윤인자와 키스를 나눴던 이향은 이듬해 <인생역마차> 촬영 도중 상대배우 노경희와의 키스장면이 신문광고에 버젓이 등장하는 바람에 몸을 잔뜩 사려야 했다. 노경희의 남편이자 배우였던 전택이가 주머니 칼을 소지하고 이향을 찔러 죽이겠다며 충무로를 헤맸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이었던 김성민이 두 사람의 협상을 중재한 다음에야 촬영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키스를 둘러싼 충무로 비사가, 애정을 둘러싼 충무로 스캔들이 어디 이것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