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오래된 정원>의 그림을 그린 화가 조덕현
2007-01-11
글 : 최하나
사진 : 오계옥
작업실 밖의 함성을 기억하며

<오래된 정원>의 연인, 현우와 윤희가 17년의 세월을 지나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은 윤희가 남긴 글과 그림을 통해서다. 문자를 이정표 삼아 근접하던 두 사람의 시간은 윤희의 화폭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로 겹쳐진다. 파릇한 고등학생 현우와 병마에 꺾어진 윤희가 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곧이어 윤희의 아버지와 어머니, 딸 은결이가 가족사진을 완성하듯 서로의 존재를 세운다. 빼곡한 말과 글로도 미처 담아낼 수 없었던 울림을 하얀 캔버스에 그려넣은 것은 화가 조덕현. 89년 첫 개인전을 연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빛바랜 옛 사진을 정밀한 드로잉으로 화폭에 재현한 <이십세기의 추억> <한국여성사> 연작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미술대상,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한 조덕현은 가상의 신화를 창조해 발굴작업을 진행한 <구림마을 프로젝트> <아스칼론의 개-미지의 신을 향한 여행>을 통해 미술, 인문학, 고고학을 결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사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제의하자 “수줍음이 많다”며 즉문즉답을 사양했던 그는 서면을 통해 짧지만 진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래된 정원>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임상수 감독이 전시회를 본 뒤 깊은 인상을 받아 제의를 했다고 들었는데.
=실은 예전에 <씨네21>에서 <오래된 정원> 영화화와 관련된 황석영 선생과 임상수 감독의 기사를 읽고 ‘좋은 영화가 하나 나오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임 감독은 10년 전 내가 지방에서 작업을 할 때 함께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더라. 이 영화에 선뜻 참여한 이유는, 실은, 80년대의 ‘상황’에 대한 정신적 채무감 때문이다. 70년대 학번으로서 80년대 초에 입대해 예민한 시기를 군복을 입은 채 보내고 제대 뒤에는 그림에 대한 개인적 고민에 휩싸이는 등 시대적 뒤틀림의 현장에서 비껴 있었지만, 작업실 밖 후배들의 함성을 결코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원작 소설을 읽으며 이미지 작업을 했을 텐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시각화 작업을 했나.
=영화에는 빠져 있지만 윤희의 경험으로 묘사된 세기말 베를린의 상황에 깊이 공감했다. 나 또한 소설 속 윤희의 나이에 그 시공간을 공유했고 거대한 담론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의 힘으로 <이십세기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에 소개되는 그림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작업기간은 한점당 일주일 정도 걸렸고, 영화의 배경에 간간이 비치는 그림들도 실은 극중 윤희의 나이, 경력과 비슷하게 맞추어 선별한 나의 옛날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작품에 참여하기 전 임상수 감독의 작품을 본 적이 있나. 있다면 어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나.
=<바람난 가족>을 보고, 감독의 ‘힘’을 느꼈었다. 특히 극중 주인공의 아들을 유괴해서 건물 아래로 휙 집어던지는 장면이나 부친이 병상에서 피를 뿜어내는 장면에서는 전율했고, ‘참 세구나’ 싶었다.

-감독이 영화 속 그림의 방향에 대해 특별한 부탁을 한 것이 있었나.
=임 감독은 직관으로 협업자를 선택하되, 믿고 맡기는 스타일인 것 같다. 그래서 특별히 부탁을 한다거나 간섭을 하지는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라 커다란 불편없이 진행된 듯하다. 그런데 영화가 완성되고 보니 치열하게 언쟁 한번 못한 것이 후회되기는 한다.

-극중 윤희를 연기한 염정아씨에게 미술 지도를 하기도 했다 들었는데.
=깜박 잊고 여배우의 사인을 받아놓지 않아 후회된다. (웃음) 미술 지도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부탁으로 이혜림이라는 대학원 제자가 개인 레슨처럼 진행한 것이다. 배우가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었기에 얼마 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중에 촬영한 클립을 보니 매우 자연스러워 ‘역시 배우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완성된 작품을 보았나.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궁금하다.
=기술시사를 통해 보았다. 영화의 전반부가 특히 좋았다. 두 사람이 빗속에서 헤어지는 장면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처연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영화가, 아니 원작인 소설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 늦게 도착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는 정치적 상황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국내 현실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현재 개인적으로 작업 중인 작품이 있는지. 있다면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부탁한다.
=특정 장소를 배경으로 인물서사와 풍경서사, 발굴서사가 종합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사연이 없는 고장이 없다지만 그중 뚜렷한 곳을 무대로 선택해 그곳의 풍경과 인물들을 회화로 드러내고 그곳에 전래되는 신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가상의 발굴작업을 이루어낼 것이다.

-평소에 영화를 즐기는 편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이나 작품이 있다면.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을 인상깊게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볼 수 없었지만 이창동 감독. <씨네21>의 독자가 되어 정성일, 허문영 평론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언어를 좋아한다.

-작가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이 있다면.
=이제 막 미술을 시작한 딸아이 세대로부터 ‘정말 좋은 작가’라는 평을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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