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50년 연기 경력 <마파도2>의 김지영
2007-01-17
글 : 이영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내 연기는 다 실전이고 경험이야

<마파도2>에 나오는 욕쟁이 할머니는 실은 엄청난 구라쟁이다. 충수(이문식)를 놀라게 하려고 흰자위를 번득이며 온갖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사촌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제 사연인 양 그럴듯하게 꾸며내기도 한다. 김지영이 욕쟁이 할머니 역할을 맡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삼청동의 한 밥집에서 진행된 인터뷰. 허기를 달래는 중간에도 김지영은 쉬지 않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팔도 사투리를 섞어가며(그는 인터뷰를 끝낸 뒤에 자리를 뜨면서도 식당 아주머니와 옌볜 사투리로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온갖 성대모사를 곁들인(김수용 감독과 임권택 감독의 말투를 그보다 더 잘 흉내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고스란히 지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리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 올해 일흔. “내 삶이 하나의 드라마이고, 그 드라마에서 자신의 연기를 끌어낸다”는 50년 연기 경력의 베테랑과의 짧은 만남은 시종 흥미로웠다.

-스케줄이 그렇게 빡빡한데, 매니저를 둬야 하는 것 아닌가.
=없는 게 편해. 방송사 PD들도 그래. 직접 통화해서 “할매, 나랑 이번에 하는 거야” 그러는 게 좋지, 매니저랑 이야기하기 싫다고 하더라고. 얼마 전에 어떤 회사에서 매니저 해주겠다고 해서 물어봤더니만 PD들이 “엄마, 그거 하지 마, 하지 마” 다 반대하더라니까. 방송사에서 날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니야. 신인이면 모를까.

-<마파도2> 촬영장인 해남 동백마을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다녔다고 들었다. 매니저가 있으면 이동할 때도 편할 텐데.
=내가 운전하면서도 작은 차 타고 다니면 멀미 나 죽겠어. 사실 비행기도 못 타고. 배는 정말 싫고. 우등 고속버스가 젤 좋아. 물병 하나 사들고 맨 앞에 혼자 앉는 자리 앉자마자 벨트 매고 크윽 하고 자. 너무 편해. 안방처럼 편해.

-관객이 알아보면 좀 그렇잖나. 자고 싶어도 못 자고.
=그래서 항상 모자 쓰고 다녀. 다른 데는 돈을 못 써도, 모자에는 내가 돈을 엄청 들여. 모자를 코 위까지 푹 당겨쓰면 아무도 몰라. 가끔 승차할 때 기사 양반이 “어디 가슈” 그러면 “쉿” 하면서 입막음할 때도 있긴 한데. (웃음) 휴게실 갈 때는 다른 승객 다 내리면 내렸다가, 얼른 화장실 갔다와서 제일 빨리 타고 그러지.

-영화 속 풍광이 정말이지 그림 같더라.
=서울에서 1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만 돼도 집 짓고 산다고 타령을 했다니까. 다른 사람들은 촬영장까지 차 타고 다니는데 난 만날 큰길에서 내려서 갔다고. 풀 냄새 좋고, 해당화 냄새 좋고. 거기다 바다내음까지. 미쳐요, 미쳐. 와 좋다, 좋다 그런다고. 백합은 얼마나 맛있던지. 터미널에 도착하면 맨 먼저 고 앞 시장에 가. 거기서 백합 사서 근처 식당 가서 삶아달라고 해서 먹고 그랬어. 아, 모시떡도 맛있지. 떡 잘 안 먹는데, 모시떡은 앉으면 한없이 먹어요. 공기 좋고, 소화 잘되니까 뭐든지 맛있어.

-촬영장에 갔던 기자가 그러는데 다른 분들에 비해서 별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
=모처럼 어려운 걸음 해서 와줬는데 같이 떠들면 좋겠지만서도. 그날은 너무 도떼기시장 같아서. 슬그머니 뒤로 빠졌지, 뭐.

-1편에 출연했던 다른 분들과 달리, 새로 합류해서 힘든 점도 있었을 텐데.
=캐릭터 잡는 것도 어렵더라고. 모든 드라마가 그래. 호흡이 잘 짜여 있는 관계가 있어. 근데 그 사이를 끼어들기는 어렵다고. 다른 친구들은 한 작품을 이미 같이 했잖아. 호흡이 갖춰져 있었지. 게다가 내가 맡은 인물의 캐릭터가 뚜렷한 것도 아니야. 치매 걸린 노인도 아니고, 술집 출신 할매도 아니고. 그냥 투입된 인물이라. 욕쟁이라는 이름이 있긴 한데, 나오는 할매들 욕은 다 잘하잖아. (웃음) 촬영마다 난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런 고민하느라 바빴지.

-어떻게 살아남았나.
=먼저 리허설 때 하는 거 봐. 그거 보면서 저 친구들은 이렇게 하는구나, 그럼 난 이렇게 가야지 감을 잡아. 고거 생각하니까 현장에서 농담 나눌 시간도 없더라고. 문제는 NG날 때야. 다시 촬영 들어가면 다른 배우들이 내 것을 해. 그럼 막막해지지. 내가 할 게 없으니까. 그렇다고 “야, 내 것을 왜 하는 거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냐. 찾다 찾다 못 찾으면 묻어가기도 하고 그랬어. 단독 숏은 이문식이랑 같이 상의도 하고 그랬는데, 다른 장면에선 눈치 좀 봤다고.

-닭 잡아준 다음에 이문식과 아옹다옹하는 건 다른 배우가 했다면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 애드리브와 엇박자 타이밍 때문인지 관객이 폭소하더라.
=고거 찍을 때는 대사를 직전에 고쳤어. 감독님의 이해를 얻어서. 그러는 바람에 대사 외우는 것도 어려웠지. 그냥 주고받는 것으로는 좀 애매해서 대사나 액션 타이밍을 좀 비틀기도 했고. 설정도 만들어 넣었어. 머리 치면 이문식이 솥에 머리 박는 것도. 코에 닭죽 기름이 좀 묻으면 고거 재밌겠다 싶었지. 근데 촬영 때 솥단지에 머리가 쑥 들어간 거야. 기름을 홀딱 얼굴에 뒤집어쓴 거 보고 웃음이 터진 거라. 너무 미안하더라고. 다시 머리 감고 분장하고 해야 하니까. 영화 보면 수건 던져주는 거 있잖아. 두 번째 촬영 때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라고. 웃는 거 들킬까봐 곧바로 돌아서서 부엌쪽으로 걸어갔던 거고.

-NG를 별로 안 내는 스타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영화에선 빠졌는데 이문식이 구조요청한다고 연기 피우는 장면이 있어. 그러는 동안 이문식의 뒤통수를 때리는 게 있는데. 그거 찍을 때도 너무 우스워서 NG를 8번이나 냈어. 내 일생 일대 기록을 세웠지. 그전까지는 후배들이 연기하면서 웃으면 정신이 해이해서 그렇다고 호통치고 그랬는데 말이야. 소품용 막대기로 머리 쳐가면서, 또 입술을 일주일 뒤에도 부어 있을 정도로 깨물었는데도 안 되더라고.

-다른 배우들은 전편보다 더 웃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과장스러운 연기가 많았다. 반면 욕쟁이 할머니는 주어지는 상황에 가장 자연스럽게 들어맞더라.
=다른 배우들이 좀 오버하면 나는 좀 눌러주고 그랬다고. 나서면 빠져주고, 아닌 것 같으면 막아주고. 밸런스야. 연기는. 같이 휩쓸리면 안 되지.

-다른 배우들은 TV드라마에 익숙해선지 주로 손과 표정만 쓴다. 반면, 욕쟁이 할머니는 발로 틱틱 사람을 건드리는 장면이 두세번 나오는데. 그걸 보면서 영화 연기가 TV 연기와 다르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방송이야 표정 같은 잔연기와 대사하는 게 전부지. 반면 영화는 내 몸을 온전히 다 보여주는 거잖아. 할머니들 중에 실제로 발을 그렇게 놀리는 이가 많아. 촬영 때 내가 그랬더니 상대 배우가 외려 놀라더라고.

-감독이 특별히 요구한 게 있었나.
=많이 맡겨줬어. 그래선지 만날 감독님, 이렇게 찍어도 돼요, 그랬어. 연기하면서도 뭘 한 건지 잘 모르겠고. 했으면 잘했는지 의심스럽고. 감독님이 오늘 촬영하면 쫑이라고 그러는데 심장이 덜커덩 내려앉더라니까. 시사 보기 전까지 심장이 벌렁벌렁했어. 영화 보고 나서는 튀지 않고 모나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편안하게 했구나 싶어서 좀 마음을 놨지만서도.

-이전에 TV단막극에서도 느꼈지만, <마파도2>에서 구사하는 전라도 사투리는 그곳 출신 같다. 사실 대부분의 배우들이 흉내내는 전라도 사투리는 충청도 사투리에 몇 가지 전라도 사투리 단어를 갖다붙이는 정도라고 여겼으니까.
=그전까지는 내가 전라북도 사투리를 했어. 드라마 <장밋빛 인생> 하면서부터 내가 남도 사투리로 들어갔지. 그게 좀 어렵더라고. 북도는 이래. 응∼그랬는가. 잉, 그랬제∼ 정도라고. 근데 남도는 말이시. 그랑께∼잉. 고것이 말이쇼. 차이가 확 나지. PD가 남도 출신이긴 해서 도움을 좀 받았고. 또 이보희가 남도 출신이잖아. 이보희가 나오는 드라마는 안 빼놓고 봤어. 다른 건 몰라도 난 언어에 대한 뭐시기가 솔찮이 발달됐어.

-전라도뿐 아니라 팔도 사투리에 능한데. 악극단 활동을 하면서 떠돌다 자연스레 익히게 된 것인가.
=아니. 1980년대 방송 드라마 시작하면서부터. 칼을 갈고 배웠어. 영화 하다가 드라마로 옮겼는데 어찌나 텃세가 심하던지. <수사반장>부터 드라마 연기를 시작했는데 대사가 정확하다면서 PD들이 많이 써줬어. 근데 그럼 뭘 해. 분장실을 못 쓰게 해서 매번 세트 한구석에서 화장을 했다니까. 텃세라는 게 참으로 더러운 것이구나 싶었지. 그래서 매일 집에 가면 모니터를 했어. 내가 어떻게 해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나. 그러면서 보는데 배우들이 사투리가 전혀 안 돼. 오케이 사투리. 내가 사투리로 잡을 것이다. 그리고 투박한 질그릇 같은 연기가 별로 없었어. 푼수나 바보 역할을 제대로 하는 이도 없었고. 요거 세개만 가지면 3년 안에 내가 다 잡아먹겠구나 싶었지. 그래서 지방 촬영 가면 시간내서 잔돈 써가며 시장 찾아다니면서 할머니들한테 떡 사먹고 사투리 배우고 그랬다고. 그 뒤로 정말 잡아먹었어. 1주일에 6일 내내 촬영이 있었고, 거의 10작품씩 해댔으니까. 한 10년 동안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는 드라마에 내가 나왔을 정도였어. 후배들 중엔 ‘어느 낙하산 줄이야?’‘돈을 얼마나 질렀어?’‘저거 뭐야, 썅∼’ 그러면서 대든 이도 있었고.

-출생연도가 1937년인가 1938년인가. 기록마다 다르다.
=1937년이 맞아. 함경북도 청진에서 났는데, 해방 직후 서울로 왔지. 6·25전쟁 나고 뭐 그러면서 호적에 아버지가 1938년으로 올려놨나보던데. 그래도 보험 들 때는 깎인 나이가 유리해서 좋지. (웃음)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가.
=아니. 내 꿈이 원래 법관이었다고. 전쟁 때문에 다 엉망이 됐지만. 내 기질은 다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야.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판사였어. 근데 그 시대에 처벌받는 건 모두 조선인이잖아. 사형 언도를 받은 조선인 중 한명이 그랬대. 마지막 말을 하라고 했는데, “당신의 대대손손이 나같이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 길로 할아버지는 법복을 벗었어. 일본인들 협박을 거부한 탓에 재산도 다 뺏기고. 그래서 함경북도로 갔다가, 만주로 갔다가 뭐 그랬어.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난 것이고. 할아버지는 북에서도 음식점 해서 번 돈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대주곤 했는데, 손녀 앉혀놓고서도 독립에 대한 이야기만 하셨어.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내가 저고리에 태극기를 숨겨 갖고 다녔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고. 집에서는 ‘따다다다’ 하면서도 학교 가선 침묵하고. 일본인 선생이 출석 부르면 대답 안 해서 골통을 무지 많이 맞았지. 나중에 그 여선생이 울더라고. 독한 년이 다 있다면서. 내가 이겼지, 뭐. 그래서 또래와 달리 난 일본말을 거의 못해.

-무대에 서게 된 건 언제가 처음인가.
=사연이 좀 길어. 전쟁과 동시에 대구로 피난 갔는데 거기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굶어서. 자식들 먹인다고 당신은 만날 물만 먹고 산 거야. 뼈까지 고스란히 말라서. 더 속상한 건 왜관 성당 수녀님들 도움으로 상을 치렀는데, 그 뒤에야 아버지한테 편지가 왔어. 동생들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이런 나쁜 인간이 다 있어. 우리 아버지지만 그랬어. 서울 와서 보니 새엄마에, 보도 듣도 못한 동생들에. 우리 엄마는 굶어 죽었는데 니네는 알콩달콩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더라고. 이 썅∼ 난리났지, 뭐. 문 부수고 새엄마 권한도 뺐고 내가 살림하고 그랬다고. 근데 한 2년 하고 나니까 너무 힘들어. 그때 알았다니까. 사람이 사람 미워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그 어린 나이에 알았다고. 죽기도 쉽지 않고 그럼 나 하나 없어지면 되겠구나 싶었지. 동생들이야 공부하니까 데리고 나오기도 뭣하고. 그러면서 극단 대중극회의 김승호 선생을 찾아간 거야. 우리 아버지랑 형, 동생 하는 사이였거든. 배우 아니라 의상 일도 있고, 소품 일도 있고. 밥이나 얻어먹자고 해서 찾아간 거지.

-반겨주던가.
=기절하고 놀라더라고. 근데 그때는 여배우가 귀했어요. 일단 대본부터 안겨주는데. 당시 대중극회는 <유랑삼천리>라는 연극을 올리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아역이 없어서 무대를 놀리고 있더라고. 아역이 손님을 울려야 장사가 되는 연극이었거든. 하룻저녁 연습해서 이튿날 국도극장 무대에 섰지. 근데 관객이 펑펑 울고 난리났어. 신동 나타났다고들 했다니까. 그걸로 무려 2년을 울궈먹었지. 생각해봐. 내가 18살이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역을 했다고. 반바지에, 세라복에, 모자 쓰고, 책가방 메고, 그 역할을 했어.

-최근작들을 보면서 할머니 역할이어도 동안이 느꼈졌다. (웃음)
=지금은 그 사진관이 없어졌는데. 진해에 있던 한 사진관에 공연 끝나고 나서 대위가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혀놓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처녀를 13살로 잘못 알고.

-1960년대 영화 출연 전까지 연극을 쭉 한 건가.
=그럴 환경이 아니었어. 처음에 무대 선 뒤에 극단 단장들이 나보고 그랬다고. 5년만 연애하지 말고 연극에만 전념하라고. 그럼 우리 연극이 산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배불러야 연극을 보러 올 거 아냐. 배고픈 시절에 누가 오냐고. 연극이 안 되니까 극단 호화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악극을 했어. 노래도 부르고, 코미디도 하고. 서영춘씨도 그때 만났지. 서울만 갖고는 장사가 안 되니까. 서울에서 보름하고 대전, 대구, 부산, 광주 그렇게 한 바퀴 돌면 1년이 가던 시절이었지.

-연극 할 수 없었던 시절에 그럼 연애는 실컷 했나.
=연애는 무슨. 우리 단체에 있던 남자들이 다 나한테 대시를 하긴 했지. 사실 집에서 나올 때 시집가기 싫은 이유도 있었거든. 겸사겸사 도망나온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귀찮게 구는 치들이 싫었다고. 그래서 물리쳤고. 나중엔 이 남자들이 아예 협공을 해. 악극 할 때가 제일 심했어. 단장 부인이 오죽하면 마산에서 아가씨 둘을 데려다가 나랑 같이 재웠을 정도였다니까. 서울 갈 때가 될 때마다 남자들이 기를 써. 어느 놈이 나를 자빠뜨리냐가 관건이 되는 거지. 단장까지 술먹고 내 방에 들어오지 않나. 그때 단원 중 유일하게 밴드 마스터 하는 남자만 날 거들떠도 안 봤어. 그래서 한번은 너무 무서워서 서울 갈 때까지만 나 좀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어. 그랬는데 한번은 이동 중에 이 남자가 나보고 맡긴 물건 좀 내놓으라고 하더라고. 그제야 다른 남자들이 ‘아, 저년이 그래서 끄떡 안 했구나’ 하는 거야. 나중에 서울 가서 아버지한테 그런 이야길 했지. 고마운 사람인데 식사 대접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둘 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주고받더니만 그 다음날 저놈 괜찮다, 결혼하라 하더라고. 연애도 못해보고 결혼한 거지.

-영화 데뷔는 김수용 감독의 <상속자>(1965)로 했다.
=5·16 나고 연기를 안 했어. 애가 둘이었으니까. 근데 우리 애들 아버지가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그랬다고. 주머니에 돈 들어오면 집에 안 와. 몇달씩. 당시 조선호텔, 워커힐 같은데 가케모치 뛰었으니까 돈 많이 벌었는데도, 1년에 한번 돈 가져다 줄까 말까 했으니까. 그런데 호화판으로 그렇게 놀더니만 폐인이 돼서 돌아왔더라고. 하루는 시장을 가는데 멀쩡하게 차려입은 누가 어귀에 쭈그려앉아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지나쳤는데 몇 걸음 놓다 보니 얼굴이 낯익더라고. 가서 보니까 남편이야.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하는데, 말도 못하고. 병원 데려갔더니 위랑 간이랑 폐랑 완전히 나갔다면서 손쓸 도리가 없다고 하네. 요양소에 보내라는데 그 양반이 아침에 나온 반찬이 점심에 나오면 손도 안 대는 사람이었다고. 요양소 보냈다가 굶어죽기 딱 십상이겠다 싶어서 내가 나선 거지. 전세 돈 뽑고, 옷 다 팔고, 다리미까지 팔아서 돈 만들어서 그 사람 병 수발 들었는데 안 낫더라고. 여름엔 썩은내 올라오고 겨울엔 추워서 얼어죽을 것 같은 10만원짜리 전셋집으로 옮긴 다음에 이 일 저 일 하는데 돈은 떨어졌지 어떻게 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때 우리 선배들이나 동료들이 영화 단역을 많이 했어. 그래서 찾아갔지.

-처음 맡았던 배역이 뭐였나.
=회장 가족 중 한명이었는데. 캐릭터고 뭐고 없어. 어떻게 대사 하나 받아서 했는데, 김수용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어머머. 첨 보는 여잔데 잘하네.” <상속자> 찍으면서 야외 촬영 가면 솔잎 따느라고 정신없었지. 솔술이 폐에 좋다고 하기에. 근데 솔잎 따다보면 송진이 손에 잔뜩 묻잖아. 그거 보고 감독님이 “아 무슨 여배우 손이 저래. 어머머, 웬일이니. 아우 창피해죽겠어” 그러셨다고. 그때 수모 많이 당했지. 촬영하다 남편 목욕시키러 가고, 집에 가서 먹을 것 챙겨주다 촬영 가고. 근 10년을 그랬어. 힘들긴 했는데 남편이 살이 뽀얘지는 것 보면 신이 나더라고. 나중에 피하 주사는 내가 직접 놨을 정도였어. 주사기 끓여서 궁둥이 빵 때려서 놓고. 그렇게 14년을 했는데 병원에서도 포기했던 남편을 살렸다고. 1960년대는 문예물이 많아서 지방 촬영이 많았는데. 지방 촬영 가면 이게 또 목돈이라. 요즘 돈으로 한 400만원쯤 되는 돈 모아서 계 묻고 그래서 영감이 나은 날 집을 사서 문패를 달아줬어. 그랬더니 남편이 “여보게, 이제는 나 술 안 먹을라네” 하더라고. 그럼 뭘해. 2년 뒤에 다시 술 마시더니 결국 간경화로 떠났어.

-듣고 보니, 아버지와 남편이 비싼 연기 공부를 시켜준 셈이다.
=내 연기는 다 실전이고 경험이야. 보시는 분들이 ‘어쩜 그렇게 실감나게 잘해요’ 하는데, 다 겪어본 일이니까 그런 거라고. 흉내내는 게 아니니까. 구체적으로 캐릭터 잡아갈 때는 지금도 사람들 유심히 관찰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하철이나 버스를 지금도 간간이 타고 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야. 오늘도 아주 재밌는 사람을 봤어. 70이 넘은 것 같은데 긴 부츠에 귀걸이에 모자까지, 20대처럼 차렸더라고. 걸어가는 건 그나마 괜찮은데 계단 올라가면서 ‘아이구구구’ 하는 거야. 그거 보면서 언젠가 나도 써먹어야지 싶더라니까.

-남편 병 수발 때문에 단역으로밖에 출연할 수 없었겠다.
=이런 이유도 있다고. 그때는 협찬 같은 게 없었던 때야. 여배우들은 다 양장점에서 제 돈 주고 맞춰서 입었다고. 근데 난 돈이 있어야 옷을 맞춰 입지. 기성복도 없었고. <돌아오라 내 딸 금단아>라는 영화를 찍을 때는 이북에서 넘어온 역할이었는데. 이북 의상이야 검은 치마에 저고리면 됐으니까 괜찮은데 이남 분량에서 입을 만한 옷이 없는 거야. 그래서 김기풍 감독님한테 ‘전, 여기서 죽여주세요’ 그랬다니까. 그래서 중간에 죽었어. <슬퍼도 떠나주마> 때도 그런 일이 있었어. 기생으로 나왔는데 조긍하 감독님이 대사 잘 친다고 나를 한가운데 앉혔다고. 근데 ‘이끼리’(‘빨리’라는 뜻의 일본말)라는 별명의 촬영감독님이 앵글을 보더니만, “어이. 거기. 저리 빠져” 그러는 거야. 감독님이 여기 앉으라고 했는데 왜 그러시나 하면서 자리를 옮겼지. 근데 감독님이 “아, 왜 그쪽에 앉아 있냐. 이쪽에 앉으라니까” 그러더라고. 몇번을 그랬는데 중간에 있는 나는 미치지. 나중에 감독이 이끼리 촬영감독한테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묻더라고. 그랬더니 “아, 미치겠네. 당신 그 옷밖에 없어. 왜 작품할 때마다 똑같은 옷이야”라고 타박하는데 정말 쪽팔렸지. 옷이라곤 다 팔고 양장 한벌, 한복 한벌 남겨뒀거든. 그때는 만들면 흥행이 되던 시절이라 하루에 서너 작품씩 짤까딱 찍고 그럴 때였는데, 단벌로 그렇게 버텼으니.

-한참 후배지만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 보면서 마음이 좋진 않았겠다.
=왕년에 무대에 설 때 나도 팬이 많았거든. 각 도에서 공연하면 따라다니던 팬들이 있었는데. 여기 와서는 아줌마로 불리니까. 아줌마는 그나마 친한 척해주는 거고. 대부분이 ‘어이 아낙네 A, B, C’였다고.

-한국영상자료원 기록만으로도 출연영화가 200편이 넘는다. 그중 가장 맘에 드는 캐릭터와 연기를 꼽는다면.
=<길소뜸>. 임권택 감독님하고 처음 한 영화 제목은 잘 기억 안 나는데. 그 뒤로 쭉 나왔어. <길소뜸>에서 내가 맡은 여자는 좀 무지하고 바보 같은 여자인데. 그나마 이재에 눈을 떠서 남편이 엄청난 재산가의 자식이길 갈망하는 그런 인물이야. 쉽지 않은 연기인데, 나중에 영화 보고 나서 내 일생에서 이거 하나 괜찮구나 싶더라고. 임 감독님이 이 영화에서 김지영씨 하나 건졌네 했을 정도니까. 그 역할로 대종상 조연상 받게 됐다는 소식까지 귀띔으로 들었는데 나중에 모 감독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되며 다른 사람에게 상을 줘버렸지만.

-이상인 감독의 독립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1990)에도 출연했다.
=그것 때문에 경찰서 가서 시말서 쓰고 나왔어. 고대, 연대, 경희대, 한양대 학생들이 함께 영화를 만든다면서 이 역할을 해달라고 사정하기에 했지. 섭외할 때 학생들이 뭐 돈이 있나. 돈 조금 받았는데, 학생들 말이 일주일 안에 끝내준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실상은 보름이 넘고 그랬지. 촬영 하러 가면 학생들 몇몇이 없어. 어디 갔냐 그러면 성동서에 잡혀 있다고 그러고. 그거 빼주러 가기도 하고. 나중에 시사회는 못 갔는데 정부에서 난리였다고 하더라고. 시사회 때 들이닥쳐서 전부 다 도망갔다는 소식만 들었지. 근데 그 일 있은 뒤로 4개월 정도 지나서 마포경찰서에서 출두하라고 하더라고. 갔더니만 계장이라는 사람이 “배우들이 말이야 돈만 받으면 아무 영화나 출연한다”고 그러더라고. 그걸 어떻게 참아. 잡아넣으려면 넣어봐라, 난 기자회견 한다고 맞닥뜨렸다고.

-2000년대 들어서도 매년 세 작품 가까이 출연해왔다. 젊은 감독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 텐데.
=<아라한 장풍대작전> 찍을 때 류승완 감독 보면서 지금 상황과 옛 의미를 잘 접목하는구나 싶더라고. 체구는 작잖아. 우리 막내딸보다 어린 나인데. 그렇게 커 보이더라니까. <…ing>의 이언희 감독도 몸도 가냘프고 그래서 속으로 잘 찍어낼까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이상이더라고. 배우가 제아무리 잘나도 역시 감독은 감독이야 싶어.

-다시 태어나면 감독 하고 싶다는 뜻인가.
=아니, 난 또 여자로 나서 배우 할 거야. 감독 골치 아파. 감독 똥은 개도 안 먹는다잖아. 속이 썩어서. 지금 내가 하는 연기가 60대 후반인데. 할머니 역은 아무리 해도 한계가 있고. 30대에서 50대 초반까지 연기를 못해봤잖아. 많은 걸 해보고 싶던 나이에 그걸 할 수 없는 조건이었으니까.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드라마를 한번 찐하게 해보고 싶다고. 찐하게 울리고, 찐하게 웃기고, 찐하게 사랑하고, 찐하게 배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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