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아이 스크린 위로 날다
어떤 이들에겐 완전한 타인이어도 어떤 부류에게는 미치게 열광하도록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유덕화, 안성기 주연의 한·중·일 합작영화 <묵공>에서 춘추전국시대 때의 양나라 왕자 역을 연기한 최시원은 13인조 그룹 슈퍼주니어의 멤버다. ‘슈퍼주니어의 멤버’라는 구절 말고 최시원을 설명할 수 있는 더 간단하고 정확한 수식어는 없다. 정상의 인기를 구가 중인 동방신기와 함께 슈퍼주니어는 비단 한국에서뿐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도 수천명의 팬들을 공항에서부터 몰고 다니는 아이돌 스타이다. 슈퍼주니어는 2005년 11월6일 데뷔 이후 거의 쉬지 않고 각종 방송, 공연 활동을 해왔다. 당연히 그는 겪을 만큼 겪었을 것이다. 대중에게 얻는 인기, 화려한 무대, 요란한 매체 등등. 그래서 스튜디오에 들어와 인사하는 태도나 인터뷰할 때의 여유로움이나 카메라 앞에서 자기 매력을 어필하는 센스 등이 하나도 신인 같지 않다. 반면 스무살 또래 남자아이다운 단순함도 있다. 육체적인 앳됨 그리고 (영화계보다 타이트하게 흘러가는) 방송계 경험에 의한 노숙함이 어우러졌을 때 풍기는 기운이란 참 묘하다.
<부모님 전상서>(2004), <열여덟 스물아홉>(2005), <봄의 왈츠>(2006) 등 세편의 드라마를 하면서 연기자로서도 차근차근 비중을 넓혀온 그이지만 <묵공>의 시나리오를 받을 때만 해도 필모그래피는 거기서 더 짧았다. “장즈량 감독님과 미팅하면서 캐스팅은 최종 결정됐어요. 감격스러웠죠. 감격스러웠는데 5분 지나고 나니까 부담감으로 밀려오던데요. (웃음) 촬영 전날엔 진짜 집에 가고 싶었어요, 다 그만두고. 제가 아직 그 자리에 설 만한 때가 아닌 것 같았고 저 때문에 영화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고. 감독님이나 유덕화 선배님이나 안성기 선배님한테 폐만 끼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정말 하기 싫었어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숨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웠던 그는 자신의 첫 촬영날 묵자 혁리 역의 유덕화와 함께 찍는 신에서 무수한 NG를 낸 기억이 있다. “카메라 4대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클로즈업이면 1cm만 잘못 움직여도 바로 앵글 벗어나요. 베테랑도 하기 힘들어서 NG 내고 그러는데 생짜 초보인 전 어땠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개봉한 홍콩에서의 시사를 포함해 최시원은 <묵공>을 4번 봤다. “맨 처음 봤을 땐 제가 실수한 게 너무 많이 보여서 창피했어요. 말씀드릴 순 없고. (웃음) 보통 분들은 모르고 지나가실 텐데 제가 봤을 때 아쉬운 부분이 많죠. 근데 처음 볼 때 (실수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그 다음에 볼 땐 좀 나아지던데요. (웃음)” 그가 <묵공>의 시나리오를 받고 반가워했던 이유 중 하나는 원작 만화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절판되어 구입이 어려운 책을 소장 중이다. “원작에서는 혁리가 완전히 대머리”라며 “유덕화 선배님이 훨씬 멋있다”고 덧붙인다. “유덕화 선배님은 아시아에서 제일 젠틀하신 분, 안성기 선배님은 아시아에서 제일 인자하신 분이세요. 영화적인 것들도 배웠지만 인생이나 가치관에 대해 더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슈퍼주니어로 데뷔하기 전 짧은 중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 덕에 최시원은 현장에서 유덕화와 중국어, 영어를 섞어 쓰며 대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유덕화가 그에게 친밀감의 표시로 옥도장을 선물했다는 건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 까마득한 후배보다도 현장에 일찍 나오는 안성기 선배 앞에선 수면 시간을 줄였고 그래서 현장에선 졸기도 했다. 가수 스케줄을 병행하며 <묵공>의 사막 현장에서 지낸 4개월은 그에게 큰 공부와 경험의 시간이 됐다.
최시원은 2003년 SM엔터테인먼트 캐스팅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되기 전까지 “막연히 (연예인을) 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 마음이 기획사에 들어간 뒤 연기쪽으로 방향을 굳혔다. 물론 당분간은 가수 일도 병행될 것이다. 두 가지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둘 다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 “과정이 좀 다를 뿐이지 대중에게 인정받아야 한단 점에선 똑같아요.” 최시원은 장자에 장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탐탁지 않은 심정으로 아들이 거둔 성과들에 대해 말을 아낀다고 한다. 2006년 골든디스크상 신인상을 수상하던 날, 다른 장소에서 열렸던 영화제 이야기를 꺼내며 아버지는 그곳에서 신인상이든 주연상이든 받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아이돌 그룹을 하면 그 이미지를 벗기가 정말 쉽지 않은 거 같아요.” 홀로 힘든 길에 들어서 있는, 최고의 아이돌 그룹 멤버 최시원이 짐짓 골치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