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1월20일(토) 밤11시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길 위의 여정은 언제나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물들의 관계는 돈독해지고, 삶의 진실은 어렴풋이 드러난다. 영화는 이들을 이상적인 목적지에 데려다주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그보다 현실적인 깨달음을 준다. 목적지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 그 깨달음이 삶에 특별히 희망을 주거나 갑작스러운 풍요를 안겨주는 것은 아니라서 이런 영화들의 끝에 남는 것은 황무지 같은 쓸쓸함이다. <알 파치노의 허수아비>도 그런 로드무비에 속한다.
영화는 감옥에서 출소한 맥스(진 해크먼)와 선원생활을 마친 프랜시스(알 파치노)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오랜 시간 사회로부터 떨어져 지낸 두 남자는, 피츠버그에서 세차사업을 하며 다시 현실로 뛰어들 계획을 세운다. 캘리포니아의 시골길에서 덴버, 디트로이트를 거쳐 피츠버그로 가는 동안 이들은 히치하이킹을 하고 중간중간 일을 하며 여비를 번다. 그러나 이들의 행로가 서부에서 동부로 가까워질수록 이들은 자신들의 꿈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게 아니라,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세상의 풍경을 마주할 뿐이다. 안정된 집단이나 가족에 속하지 못하고 길 위에 선 남자들의 이야기는 당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요 경향이었다. 과거의 공동체, 통합된 세계에의 꿈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의 남자들은 이제 서로에게 의존한다. <알 파치노의 허수아비>에서도 두 남자의 좌절감과 상실감을 치유해주는 것은 단순한 우정이나 의리를 넘어서는 서로에 대한 긴밀한 믿음과 애정이다.
<알 파치노의 허수아비>는 칸영화제 황금종료상을 수상한 첫 번째 뉴아메리칸 시네마라는 점 외에도 알 파치노와 진 해크먼의 공동주연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배우의 조합은 사회에서 소외된 ‘허수아비’들의 고독한 관계를 형상화해내며 기대 이상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감독 제리 샤츠버그는 사진작가 출신답게 당대 미국의 황량한 풍경을 형상화해내는 데 재능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세찬 모래바람만 몰아치는 가운데 길 위의 두 남자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소통을 시작하는 그 긴 오프닝 시퀀스는 아름답고 압도적이다. 이 도입부의 황량함은 영화가 끝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지만, 아니, 더 악화되지만,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다시 홀로 남은 맥스가 마지막 여비를 털어 피츠버그행 티켓을 사고 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