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의 ‘여우비’ 목소리 연기한 손예진
2007-01-19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사춘기의 설렘을 기억하는 여우

“그림 좀 다시 보여줄래요?” 아무래도 걱정되나보다. 손예진은 사진기자에게 자신의 표정과 자세가 ‘얹혀질’ 애니메이션 장면을 재차 보여달라 한다. 하긴, 스튜디오에 거울 하나 세워놓고 “자, 이제 여우비로 변신해주세요”라는 난감한 주문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는 일이 쉽진 않을 것이다. “합성이 될 최종 그림을 상상하면서 표정을 지어야 하니까 좀 힘들긴 하죠.” 이런 난처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촬영을 끝내고 난 뒤, 손예진은 <천년여우 여우비>(1월25일 개봉)의 캐릭터 스케치만을 보고서 10살배기 소녀와 100살 먹은 오미호(五尾狐)로 수시로 둔갑해 갖가지 기성(奇聲)을 흘려야 했던 때의 곤혹스러움부터 털어놓는다. 덧붙여 자신의 목소리가 진기한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던 순간의 설렘과 기쁨에 대해서도 슬쩍. 난생처음 목소리 연기를 하면서 느꼈다는 그의 감정들은,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요요들과 함께 인간세계에 뛰어든 뒤 사랑이라는 낯선 기류에 휘말리는 여우비의 마음과 똑같지 않을까.

-아무런 정보없이 봤는데, 목소리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더라.
=다행이다. 다들 내 목소리 같지 않다고 한다. 아, 후반작업하면서 만진 건 절대 아니다. (웃음)

-목소리 연기는 처음이다. 두렵지 않던가.
=설렘이 더 컸다. 이성강 감독님도 10살짜리 소녀의 목소리를 원했던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10살 꼬마나 전문 성우를 썼겠지. 내가 아직 자아정립이 안 돼서 항상 사춘기다. 여우비처럼. 그래서 덜컥 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목소리 연기를 해보고 싶었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많이 보는 편이다. 특히 DVD로 할리우드 배우들이 녹음하는 장면을 몇번 본 적 있는데 그때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일더라.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건 다 챙겨 봤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엔 자극적인 것도 많은데 그것보다는 아이디어가 독창적이고 신기한 쪽에 더 끌린다. <천년여우…>는 스케치만 봤는데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본인의 캐릭터는 맘에 드나.
=학교에 들어간 여우비가 왕따당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밥도 너무 잘 먹고 극기 훈련도 더 받고 싶다고 씩씩대는 장면도 좋고. 그러다가 거울을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어보기도 하고 배도 부풀려보기도 하고 사춘기 소녀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도 좋고. 마지막에 금이 영혼 찾으려고 애쓰는 애처러운 장면도 좋고. 여러 감정들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여우비 목소리는 일부러 중성적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것 같다.
=활달한 성격이잖나. 여성스런 소녀의 목소리는 안 어울릴 것 같았다. 또 10살 꼬마인데 아직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엔 좀 그럴 것 같았고. 소년과 소녀의 중간 정도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첫 녹음 때 이성강 감독이 맘에 들어하던가.
=감독님은 잘 모르겠더라. 대단한 포커페이스를 갖고 계신 분이라서. 좋아하는지 아닌지. 처음엔 목소리 내는 나도 어색하고, 스탭들도 어색해하고 그랬다. 오버해야 하고 과장해야 하는 부분에선.

-스케치만 보고서 목소리를 내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전엔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목소리를 붙이는 줄 알았다. 아니더라. 80% 정도는 첫 녹음 때 것을 썼으니까. 감독님이 전후 장면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해주시지 않았다면 많이 헤맸을 거다.

-녹음하면서 감독의 특별한 요구가 있었나.
=좀더 밝게. 좀더 천진하게 정도.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해서 갔는데 처음엔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녹음하다 보니까 이 장면에선 이 목소리, 이 톤이 좋겠다는 감이 저절로 왔다. 동화의 세계에 쉽게 빨려들 수 있었던 건 요요 역할을 맡았던 전문 성우들과 같이 녹음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묻어서 간 거지. 근데 멀쩡한 분들이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를 내는데 정말 신기하다. 게다가 한분이 여러 캐릭터를 번갈아 맡기도 하고. 저런 목소리는 누가 가르쳐줬을까. 성우학교가 따로 있나 싶었다. 특히 먹으면서 내는 소리는 들을 때마다 감탄했다.

-감독이 OK를 했는데도 다시 가자고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던데.
=기본적으로 2, 3번씩은 했다. 내 본래 목소리가 나오면 다시 가자고 했다. 저거 손예진 목소리구나 여겨지는 게 싫어서 계속 반복했던 것 같다.

-강 선생을 홀리기 위해 여우비가 섹시한 여성으로 변신하는 장면이 있다. 그건 다른 성우가 한 것 맞나.
=아니. 내가 한 거다. 그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으니 좀 헷갈릴 거다. <X파일>의 스컬리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한 건데. 왜 친구들 만나면 성우들 목소리 흉내내고 놀지 않나. ‘흑흑’대면서 오버하는. 대수롭지 않게 했던 것 같다.

-하긴 나도 가끔 혼자서 아이 목소리 내면서 놀기도 한다.
=그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친구들하고 장난치면서 그럴 순 있어도 혼자서 그러는 건 좀. (웃음)

-녹음할 때 차려 자세로 하는 건 아닐 테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선 몸을 쥐어짜야 하기도 했을 것 같고.
=류덕환이라는 친구가 그거 잘하더라. 성우 못지않은 굉장한 미성의 소유자인데다 <마리이야기>에서 이미 경험이 있어선지 능숙했다. 호흡 같은 건 옆에서 보면서 따라한 게 좀 있다. 이를테면 ‘윽’ 해야 하면, 가슴을 움켜잡고서 소리를 내던데 나도 그렇게 했다. 다만 여우로 변신할 때 끄응하는 목소리 같은 건 어려웠다. 그런 부분들은 감독님이 조금 만지셨을 거다.

-감독이나 류덕환이나 처음치곤 매우 잘했다고 하더라.
=(공)형진 오빠랑 류덕환씨랑 같이 녹음한 건 하루였는데. 다들 감독님한테 잘했다는 칭찬받으면 좋아라 하는 분위기였다.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초등학생이었지, 뭐. <클래식> 할 때 더빙이 굉장히 많았다. 동시녹음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곽재용 감독님이 어떻게 현장에서보다 더 잘하냐고 하시더라. 울부짖고 그런 감정 장면인데도 말이다. 남들보다 흡수를 좀 잘하는 편이다. 눈치도 좀 빠르고. 경험을 쌓으면서 내가 뭐가 부족하구나 하는 걸 상대방의 눈에서 읽겠더라. 신인 때는 정말 주위가 안 보이는데. 내 밥 찾아먹기도 힘들 때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잘 안 들리고.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시야가 넓어진다.

-시야만 넓어진 게 아니라 말수도 많아졌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웃음) 그전엔 어떻게 나를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미숙했던 거지. 지금은 인터뷰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지인들도 전보다 밝아졌다고 한다.

-<연애시대>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했다.
=많이 돌아다녔다. 몰디브도 가고, 일본도 가고, 파리도 가고, 미국도 가고. 돌아본 곳 중엔 피렌체에 있는 산지미냐노가 가장 좋더라. 시인과 화가들이 묵는 곳이라던데. 오래된 성곽도 있고, 돌이 깔려 있는 길도 맘에 들었다. 동화 속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니저 없이 아는 언니들이랑 다섯이서 갔는데 자유를 얻은 것 같아서 좋기도 했고. 3일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다녀도 되고. 걷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아니 왜.
=우기였다. 비 맞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옷 갈아입으면 뭐하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웃음) 같이 간 언니들이 부끄러워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타박했지만.

-다음 작품은 뭔가.
=<낙랑클럽>(가제)이다. 해방 전후가 배경인데. 시대와 이념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여자 이야기다.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감정이라서 찍기 전부터 엄청 긴장하고 있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당분간 휴식 같은 건 없을 것 같다.

의상협찬 Anna Sui Collection, Moschino, Paul smith women, Obzee, manolo Blanik, Fragment·스타일리스트 정윤기, 신지혜(intrend)·헤어&메이크업 김혜숙, 윤혜란(jenny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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