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피의 일요일, 그 참혹한 기록, <블러디 선데이>
2007-01-25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EBS 밤 11시

1972년 1월31일, 북아일랜드 데리시의 평범한 주민들은 영국 정부에 대항해 시민권을 주장하기 위한 평화행진에 나선다. 그러나 영국군은 시위를 완전봉쇄한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고 결국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에 이른다. 군인들의 무차별적인 총격 속에서 13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살해된다. 사건은 조작되었고 영국군들 중 그 누구도 이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블러디 선데이>는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뒤, 이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재현하는 영화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역사를 그저 쳐다보았을 뿐인 런던의 십대 소년은 감독이 되어 그날의 역사 안으로 들어간다. 폴 그린그래스가 역사를 불러내는 방식은 특별한 논평없이 그때 그 사건을 최대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피의 일요일’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배우로 참여시키거나 핸드헬드 촬영을 통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의 절박함을 한껏 고조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현장 다큐멘터리와 같은 긴박함으로 역사를 고발하는 듯한 이 영화는, 그러나 상당히 의식적으로 균형 잡힌 구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아일랜드 하원의원인 아이반 쿠퍼가 평화시위계획을 발표하는 기자회견과 영국군이 그 어떤 시위도 불허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기자회견을 교차로 보여준다. 이 대립되는 주장의 병렬은 영화의 끝까지 계속되어 시위현장과 군 지도부 사무실 혹은 시위대와 영국군의 모습이 번갈아 등장한다. 감독은 둘 사이의 간극에서 비극의 원인을 찾으며 한쪽 진영에만 무게를 싣는 것은 오히려 사건을 파편화해 그 전말을 볼 수 없게 만든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아무리 당시의 비극을 역사 밖으로 꺼내어 보는 이들을 분노와 고통에 시달리게 할지라도, 감독이 취하는 태도에는 여전히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다. <블러디 선데이>에는 ‘블러디 선데이’ 이전과 이후에 대한 입장이 없다. 과연 그 누가 역사적 순간의 객관적인 기록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는 폴 그린그래스가 역사를 대할 때 고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플라이트 93>에서도 그는 9·11 테러에 대한 통찰을 배제하고, 당시 펜실베이니아에 추락했다고 ‘믿어지는’ 비행기 내부로 이야기를 한정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영화에서 보아야 할 것은, 단지 슬픔만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은폐하고 있는 지점들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