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후면비사]
[한국영화 후면비사] 기브 미 초콜렛의 씁쓸한 추억
2007-02-08
글 : 이영진
헤스 대령의 미담 담은 할리우드영화 <전송가>에 25명 한국전쟁고아 불쌍한 모습 비춰

1956년 1월28일치 일간신문에는 제7회 동계올림픽 출전단에 대한 기사가 일제히 떴다.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36개국에서 947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한국은 전란 통에 전 대회에 불참한 터. 그래선지 임원 3명, 선수 4명, 모두 합해서 고작 7명인 단출한 선수단이었지만, 감격과 관심은 예상보다 높았다. 언론은 “파란 빤-쓰에 황갈색 코―트”를 휘날리며 보무 당당하게 입장하는 한국선수단이 현지 관중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썼다. 하지만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된 25명의 고아들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해맑게 웃고 있는 고아들의 표정과 한 미군의 얼굴을 합성한 이 사진은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의 아름다운 결정(結晶)”이라 불린 사연과 함께 같은 날 각 신문의 톱을 모조리 차지했다.

주인공은 제주도 한국보육원에 있는 아이들과 한국전쟁 당시 이들을 수송기를 통해 피신시켰던 딘 E. 헤스 대령이었다. 헤스 대령은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 훈련관으로 참전한 인물로, 고아들을 제 자식처럼 돌본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6년 전 ‘고아작전’이라 불리는 계획을 실행하면서, 훗날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사연은 이렇다. 못 쓰게 된 탱크에 숨어살며 연명하던 고아들을 보살피며 서울의 중앙고아원에 보내던 그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을 제주도로 피난시키기 위해 한국 해군에 LST(전차 상륙용 주정)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한다. 퇴각하기 바빴던 것일까. 인천 부둣가에는 무려 1천여명의 고아들이 모였으나 피난선은 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7명의 고아들은 질병과 기아로 죽어갔다. 결국 미 공군에 급전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50년 12월20일, 18기의 군 수송기로 이 고아들을 제주도의 한 농립학교로 이송하는 데 성공한다.

할리우드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실화라는 점에 더욱 끌렸을 것이다. 헤스 대령의 자서전이 출간되자 유니버설도 동명의 영화 <전송가>(Battle Hymn) 제작에 들어간다. 더글러스 서크 감독, 록 허드슨 주연. 이것만으로는 양이 안 찼는지, 유니버설은 한국보육원의 고아들을 출연시키겠다고까지 발표했다. 그리고 1956년 3월6일. 여의도 공항에는 남자아이 11명, 여자아이 14명, 그리고 보모 4명 등 30여명의 대규모 할리우드 출정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LA로 떠났다. 후속보도는 계속됐다. “(아이들은) 유쾌한 대침실에서 기거하고 있으며”, “미국 어린이들과 같은 간식물을 받는 동시에… 김치와 쌀 같은 것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촬영이 없으면 한국인 교사로부터 수업을 받고 또 낮잠을 자기도 한다”. 록 허드슨의 말도 빌렸다. “떠들던 아이들이 촬영을 시작하면 얌전해진다. 장차 많은 자녀를 갖게 될 텐데 참으로 좋은 경험이 됐다.”

할리우드가 극적인 허구의 드라마를 원했다면, 한국은 훈훈한 실제의 미담을 갈구했다. 전쟁 직후 집계된 고아 수만 무려 5만9천여명이었다. 고아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포성이 멎은 뒤에도 “드럼통 속에서도 가마니때기 속에서도 사람이 살았다”. “살기 위해서는 비굴하거나 공갈을 쳐야 했던” 시절이 계속됐다. “뷔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샌프란시스코>(1952)라는 유행가에서 드러나듯이, 미국(美國)은 미담(美談)을 타고 더더욱 아름다운 별이 되어갔다. 신문들도 친절한 헤스의 사연과 고아들의 할리우드 입성 타전에 멈추지 않고, 앞다투어 한없이 마음씨 넓은 미국인들의 고아와 혼혈아 입양 소식을 전하느라 바빴다.

미담의 불씨가 된 <전송가> 개봉을 앞두고 서울이 시끌벅적해진 것은 당연지사. <전송가>의 미국 개봉 뒤, 텍사스주의 여고생들이 한국에 모금품을 보내왔다는 소식까지 덧붙여졌다. 1957년 6월26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특별자선시사회에 앞서서는 주한 미 공군사령부가 L-20 제트기 편대까지 동원해 시내 곳곳에 자선시사회 개최 및 개봉 소식을 알리는 ‘삐라’까지 뿌렸다. 자선시사회에서 거둬진 총수익금은 모두 한국보육원에 기증됐다. 여기까진 좋았다. 개봉을 앞두고 정부가 <전송가>에 면세조치를 취해줬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영화계에선 “한국의 후진성을 강조하는” 영화에 막대한 세금을 감면해주고, 정부가 나서서 학생들의 단체관람을 부추기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정부는 “몇 가지 장면에 문제가 있다”는 시인과 함께 결국 면세조치를 취소했다.

인도 출신 여배우가 한국 보모 양은순 역할을 맡아 서툰 한국말로 대사를 하고, 고아들이 껌을 달라며 미군에게 애걸하는 영화를 고운 눈으로 바라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기브 미”를 외쳐놓고 이제와서 자존심이냐고? 비슷한 시대를 경험한 또 다른 이의 육성을 들어보자. “미국인은 무슨 까닭인지 10살 미만의 어린 꼬마들을 향해 흡사 병아리에 모이라도 주듯 연거푸 과자와 캔디 따위를 훌훌 땅으로 뿌려주고 있다. 한편 꼬마들은 그 미국인의 손길에 따라 더 많은 과자를 줍기 위해 서로 다투듯이 땅바닥을 기고 있다… (중략)… 미국인은 또 소년들이 땅을 기는 것을 카메라를 들이대고 분주하게 찍어대고 있다.” 현길언이 소설 <헬로우, 아이 러브 유>에 썼듯이 미담 또한 거짓을 감추고 있는 요란한 말풍선일지 모른다. 헤스의 사연은 그 자체로 미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송가>에서 한국인들은 “헬로, 아이 러브 유!”라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저 아름다운 나라를 향해 욕지기라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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