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장이모식 탐미주의의 절정
2007-02-1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저항하는 중화사상의 스펙터클 <황후花>

<황후花>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장이모가 당나라를 무대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절을 바탕으로 그 특유의 탐미주의적 미장센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두 가지 스펙터클을 본다. 거대한 황실의 내부에서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치장하는 여성들의 몸과 광활한 대지를 역주하는 병사들의 이미지, 장이모는 이러한 단순한 병치를 통해 정점에 이른 권력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황실의 화려함을 노골적으로 뽐내기라도 하듯 온몸을 황금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황후(공리)가 등장하는 순간, 완전했던 황실의 이미지는 이내 훼손되고 만다. ‘병든 황후’, 그녀의 떨리는 손과 신경질적 눈빛, 정작 권력의 중심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병들어 있는 것은 황후의 건강만이 아니다. 황후는 황제(주윤발)의 전처에게서 얻은 첫째아들과 근친상간적인 관계이고, 황제는 황후를 천천히 독살하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 장이모는 이처럼 ‘화려함 속에 병든 이미지’가 권력이라는 동전의 양면임을 드러내고자 했겠지만, 그것이 곧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은 <황후花>의 표면적 화려함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외양 속에서 ‘안타깝게도’ 병들어가는 듯한 장이모에 대한 것이다.

장이모식 탐미주의이거나 낭비적 전시이거나

장이모의 <황후花>는 미장센화된 표층의 힘으로 관객을 유혹하는 작품이다(솔직히 고백하자면, 영화의 화려한 미장센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웠다). 영화의 표층은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황실의 전경이나 실내 공간뿐만 아니라, 찻잔의 세밀한 조각, 칼의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움직임, 그리고 갑옷의 미세한 떨림까지, 즉 ‘극대’에서 ‘극소’까지 사물화된 풍경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어찌 보면, <황후花>의 화려한 미장센은 영화가 묘사하는 권력의 속성을 닮은 듯하다. (봉건적) 권력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 그 스스로의 ‘과시적 낭비’인 것처럼, <황후花>는 그 어떤 블록버스터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표층을 과시하여 전시함으로써 (이후 언급할) 권력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한다. 장이모가 이렇게 낭비적으로 전시된 시각적 미장센을 관객에게 미끼로 던질 때, <황후花>의 표층은 모든 시선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한다. 이는 단순하게 관객의 시선이 머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장이모가 과거의 중국(영화)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서구세계가 중국영화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중국 관객이 중국에 대해 꿈꾸는 시선 모두가 그 표층에서 조우함을 의미한다. 장이모의 영화에서 표층이 낭비적인 미장센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단순하게 ‘과잉’이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황후花>의 서사는 단순하다. 몇 가지 채워지지 않는 빈틈이 있기는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인물 관계들을 중심으로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채워 나간다. <황후花>는 캐릭터와 사건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미장센을 사용하기보다는 미장센을 전시하기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사건을 구성하는 듯하다. <황후花>가 서사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치정극은 굳이 황실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장이모의 영화가 아니었을 때만 가능한 지적이다. <국두>에서 원작에는 없던 염색공장을 등장시켜 원색의 색감으로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시각화했고, <홍등>에서 좌우 대칭의 폐쇄적인 공간 구도를 통해 봉건적인 억압구조를 표상했다면, <황후花>의 화려한 미장센과 의상은 서구의 시선을 충족시키면서도 그에 대해 저항하는 이중적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이모의 시각적 탐미주의를 오리엔탈리즘적인 서구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전략으로 비판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지적은 타당성이 유효하다 하더라도 상투적인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의 장이모 영화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서구인 시선을 충족시키기 위한 전략이 곧 그에 대해 저항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황후花>에서 우리가 만나는 장이모는 중국사회의 봉건적 억압성을 비판했던 5세대 감독군의 리더로서의 장이모가 아니라, 대작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으로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넘어서야 하는 장이모이다. 이를 위해 장이모가 선택한 전략은 과잉적 미장센을 통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흉내내기’인데,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저항이면서도 과시적이다 못해 낭비적인 탐미주의에 대한 장이모식 자기변명이기도 하다.

장이모가 택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흉내내기의 저항이 먹혀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원본과 닮아야 하지만 원본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차이를 구현했을 때 흉내내기의 저항성이 발생하니까 말이다. 장이모 영화에서 이러한 차이를 규정해주는 것이 바로 상상화된 중국의 과거 이미지이다. 그에게 중국의 과거 이미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유사한 스펙터클을 창조할 수 있는 동력이자 할리우드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차이의 대상이다. 즉, 장이모가 담아내는 중국이 ‘상상된 기억’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시뮬라크르적인 중국의 이미지가 자본주의화된 현재의 중국사회를 위협하는 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장이모식 자기 정당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라는 장이모 영화의 중핵적 요소이다. 홍콩 출신의 탈식민주의적 페미니스트인 레이 초우(Rey Chow)는 일찍이 장이모 영화에 흐르는 중화사상적 요소들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5세대 시절 중국 정부와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정부와 한 지점에서 정을 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황후花>의 극단적이고도 낭비적인 미장센이 문화적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중화사상의 이명이라 한다면, 장이모의 이러한 저항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다.

저항의 스펙터클

<황후花>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내게는 웅장한 궁중 전투신이 아니라 그 직후의 장면이다. 황제에 저항했던 수많은 대군이 전멸하다시피한 채로 반란이 제압된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어지럽던 황궁이 본모습을 되찾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반란은 모호한 엔딩 속에 흔적으로만, 자연의 질서를 상징하는 그 원 속에 얼룩으로만 남는다. 수많은 대군의 반란이 고작 그 얼룩 하나인 것이다. 어쩌면 이는 장이모가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에서 저항의 궁극적 중심에 서 있는 황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실제로 황후의 반란이 결국에는 조그마한 얼룩으로 남게 되는 과정은 장이모의 나르시스적인 저항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황후는 왜 황제에게 저항하는 것일까? 그녀는 황제가 독살을 준비하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 듯하고, 그녀는 그 이전부터 그러한 계획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가장 설명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왜 황후는 반란을 꿈꾸는가? 황제는 모든 것을 소유한 인물이고, 그의 말처럼 다른 이들은 그가 주는 것만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약이 황제의 폭압적 성격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에게 반란을 꾸밀 정도의 이유는 아니다. 황제가 그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배신감 때문일까? 아님 전처를 잊지 못하는 황제에 대한 질투? 이 모든 것이 중층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황후가 10만 대군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유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황후의 저항이 내러티브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스펙터클의 창출을 위해서 요구된 것이라고, 달리 말해 그녀는 내러티브적 인과율에 따라 그 저항의 이유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 ‘저항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그려졌다고 본다. 황후와 그녀의 아들인 원걸(주걸륜)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이미 황제가 반란을 준비한다는 것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저항은 반란의 결과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반란 자체를 목적으로 한 저항인 셈이다. 즉, 황후가 원하는 것은 황제에게 저항함으로써 폭압적 황제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항하고 있다는 저항의 스펙터클 자체를 목격하는 데 있다. 이러한 면에서 황후는 신경질적인 나르시시스트에 불과하다.

내가 황후가 장이모식 저항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의 저항은 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저항이 아니라 저항 자체를 스펙터클로 둔갑시키기 위한 저항이고, 이는 앞서 말했듯이 중화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이모식 저항을 ‘또 다른 지배를 위한 저항’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황후는 황제에 저항을 하면서도 그와 다른 어떤 세계를 꿈꾸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인 원걸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자가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모자가 반란에 성공해서 중국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광대하면서도 섬세한 스펙터클, 그 낭비적 미장센의 풍경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