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실베스타 스탤론, <록키 발보아>로 다시 돌아오다
2007-02-15
글 : 박혜명

2월25일 개봉하는 <록키 발보아>는 <록키5> 이후 16년 만에 만들어지는 속편이다. <록키> 1편이 제작된 해로부터는 30년이 흘렀다. 무명이던 실베스터 스탤론은 1976년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쓴 시나리오로 주연에 데뷔해 전례없는 영화적 히트를 경험했다. 록키는 신드롬이 됐고 스탤론은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가 됐다. 이후 스탤론의 경력은 부침이 심했다. <록키5>와 <람보3>가 각각 흥행과 비평에서 참패한 뒤로 스탤론의 커리어는 내리 하향세였다. 사람들은 그를 록키나 람보로만 기억했고 그렇게 그가 영원하기만 기대했다. (본인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스탤론이 선택하는 새로운 시도들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록키는 그가 죽을 때까지 벗어나야 할 굴레였다. 스탤론이 돌아온 것은 그 자리다. 그의 몸은 늙고 처졌고, <록키> 시리즈를 동시대에 즐겼던 관객은 극장을 자주 찾지 않는 세대가 됐다. <록키 발보아>는 시리즈의 최종편이다. 이 마지막을 그가 내놓는 이유와 그 과정의 이야기들을 찾아 여기 실었다.


<록키 발보아>

어김없이 권투 시합 장면이다. 언제나 전편의 마지막 경기를 맞물려 가던 오프닝 시퀀스가 <록키 발보아>에서도 반복된다. “록키! 록키!” 전설적인 헤비급 챔피언을 찾는 관중의 외침이 오버랩되는 가운데 링 안의 권투선수가 KO펀치를 날린다. 그는 흑인 선수다. ‘이탤리언 스탤리언’(Italian Stallion: 이탈리아산 종마) 록키 발보아가 아니다. 물론 당연한 시작이다. 1990년작 <록키5>의 마지막 장면에서 록키는 권투를 하지 않았다. 록키는 4편에서 소련의 무쇠 파이터 드라고와 싸운 다음 뇌손상을 입었고 어떤 명분으로도 글러브를 다시 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5편의 록키 발보아는 유력 프로모터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 도전경기를 거절한다. 그는 1편에서부터 읊어온 은퇴를 마침내 실행에 옮겼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오랜 친구이자 말썽 많은 처형 폴리(버트 영)가 사기를 당해 덩달아 재산을 잃었어도, 링에 복귀하는 대신 후배를 키워 내보낸다. 록키가 권투를 하지 않은 5편은 미국에서 4천만달러밖에 벌지 못했다.

16년 만에 제작되는 속편에서 록키가 여전히 글러브를 끼지 않으면 그보다 미련한 계산도 없을 것이다. 록키는 링 위에 오른다. 다만 그 감격적인 순간에 도착하기까지 영화는 퇴물 복서의 그늘진 주위를 오래 맴돈다. 아내 애드리안이 죽었고, 아들 로버트가 아버지를 피하고, 친구인 폴리가 짜증을 내는 현실이다. 록키는 프로권투 자격증을 다시 따고 싶어한다.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헤비급 챔피언 메이슨 ‘더 라인’ 딕슨(안토니오 타버)이 비겁한 기술로 KO승을 거두자 캐스터와 해설위원이 입을 모은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열정과 감동, 스릴을 안겨주었던 전사 같은 선수들입니다.”

환영받지 못한 록키부활 프로젝트

“지금 저 개가 뭘 하는 중인지 아나? 자세를 갖추고 누워 있는 거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죽어가는 게 아냐. 저 개한텐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어. 잘만 먹여줘도 금세 원기를 회복할 거야.”(<록키 발보아> 중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은 <록키> 시리즈 2편에서부터 각본, 연출, 주연을 겸해왔다. <록키 발보아>의 오프닝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이 했던 말은 스탤론 자신의 마지막 변명이자 신념이다. <록키>는 최대 성공에서 시작해 최대 나락으로 끝난 할리우드의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다. 록키를 되살리겠다는 생각은 격려조차 받지 못했다. “시리즈를 같이 만들었던 제작자들이 그랬다. 이 영화엔 아무도 관심이 없어. 조금도, 조금도! 록키는 죽었단 말야!” 죽은 건 록키뿐이 아니었다. 스탤론도 죽은 존재였다. 1985년 나란히 개봉한 <록키4> <람보2>가 각각 1억2700만달러, 1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인 이후 그가 찍는 영화들은 미국에서 5천만달러 이상의 흥행도 힘겨워했다. 그해 최악의 영화와 배우를 가차없이 꼽기로 악명 높은 골든라즈베리 어워드는 <록키4>(1985)에서부터 <드리븐>(2002)에 이르기까지 17년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스탤론과 그의 영화들을 후보에 올렸다. <코브라> <엄마는 해결사> <클리프행어> <데이라잇> <스페셜리스트> <어쌔신> <겟 카터> 등이 줄줄이 놀림감이 됐다. 스탤론은 매해 1편 이상의 영화를 찍었다. 해외수입을 포함하면 1억달러가 넘는 경우도 있었고 예산 대비 언제나 흑자였지만 그것은 보기 흉한 박리다매와 비슷했다. 스탤론의 커리어는 도미노처럼 쓰러져 있었다.

<록키 발보아>가 프로덕션에 들어간 순간부터 스탤론과 록키는 할리우드에서 유행하는 농담거리가 됐다. 데이비드 레터맨은 자신의 쇼에서 이런 말을 했다. “<록키 발보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을까요? ‘요(yo), 애드리안, 내 고혈압 약은 갖고 있지?’” 스탤론은 마이애미에서 대학을 나왔다. 1994년엔 마이애미시로부터 명예시민에게 수여하는 도시의 열쇠를 받았다. 감동한 스탤론은 곧 LA를 떠나 마이애미로 돌아갔고 2년간 살았다. 그곳 일간지 <마이애미 해럴드>는 이렇게 썼다. “이 영화야말로 인류가 가진 아이디어가 바닥났다는 걸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다.” 세 번째 아내 제니퍼는 스탤론을 설득했다. “하지 말아요. 창피만 당할 거예요.”

제니퍼 플레빈은 스탤론과 1997년 결혼했고, 둘 사이엔 세딸이 있었다. 스탤론은 <록키4> 촬영장에서 눈이 맞았던 모델 출신 여배우 브리짓 닐슨과의 짧은 결혼을 “내 인생의 최대 실수”라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제니퍼에 대해서는 버릇처럼 감사를 표했다. 제니퍼의 반대는, 매번 은퇴를 번복하고 시합에 나서는 록키를 애드리안이 만류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도 안다고 대답했다. 알지만 해야 한다고. 나도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지만 내가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고 마음 상하느니 차라리 하고 나서 욕을 먹겠다고 했다.” 시리즈 아무 편 속의 록키처럼 스탤론은 아내를 설득했다. 그는 6편을 위한 최선이 시리즈 1편 <록키>의 헝그리 정신을 따르는 것임을 알았다.

“부엌에서 나와. 거기서 나오라고! 죽은 사람처럼 사는 거 정말 못 보겠어. 나가서 즐겨. 평생 낙오자로 살래?”(<록키> 중에서)

<록키 발보아>

어릴 때 스탤론은 자신이 루저라고 믿었다.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로 신경을 다친 뒤 스탤론의 얼굴은 왼쪽 근육이 영원히 마비되었고 입술이 비뚤어졌고 두눈이 비정상적으로 처졌다. 몸이 작고 말랐으며 이름은 TV만화 <루니 툰>에서 샛노란 카나리아의 꽁무니를 쫓다 골탕먹고 돌아서는 멍청한 고양이 ‘실베스터’와 같았다. 그는 근육 마비로 인한 발음 장애도 겪었다. 어린 실베스터가 말을 하면 고양이 실베스터보다 멍청했다. 가수의 꿈을 버린 적 없는 이발사 아버지는 스탤론을 “뇌 발육이 멈춘 놈”이라고 했다. 아홉살 때 그의 아버지는 한번 망치질로 못 박는 법을 가르쳤는데 스탤론은 세번 망치질을 해서 꾸지람을 들었다. 열다섯살 때 같은 반 친구는 “전기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말년을 보낼 것 같은 아이”로 그를 지목했다. 스탤론은 제 이름이 싫었다. 그는 스스로를 ‘슬라이’(Sly: 교활한)라고 불렀다.

슬라이는 현실에서 도망다녔다. 극장에 처박혀서 각종 액션영웅 스토리에 심취했다. 셔츠를 붉게 물들여 S자를 그리고 파란 수영복을 찾아 입었다. 열세살의 스탤론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면 슈퍼맨으로 변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의 눈을 한순간 멀게 한 건 미스터 유니버스 출신의 근육질 배우 스티브 리브스가 주연한 <헤라클레스>였다. “나는 12살 때부터 인생을 바꾸려면 몸을 바꿔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스탤론은 리브스 같은 몸을 소원하고 무작정 운동을 시작했다. 공터에서 고철물을 들고 놓는 것이 전부였지만.

몸을 다짐으로서 난관을 극복하는 삶은 그렇게 일찍 시작됐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미식축구부에 가입했다. 형편없는 운동신경과 싸우면서 1년 동안 축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이 지나고서 스탤론은 주장이 됐다. 주로 강도 역할로 단역을 전전하던 시절에도 “영화배우는 언제든 캐릭터에 맞는 육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혼자 새겼다. 어눌한 말씨와 불완전한 표정 근육 때문에 번번이 오디션에 떨어지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한 것은 생존이었다. 연출까지 하겠다고 마음먹고 닥치는 대로 인도영화들을 섭렵하기 시작한 것도 그에겐 생존이었다. 스스로 영화를 만들게 되면 어릴 때 꿈꾸었던 액션영웅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무하마드 알리와 시합을 벌이는 무명 복서 이야기를 썼다. <록키>의 초고였다.

전설의 복서, 록키의 탄생

“난 아무것도 못 되는 인간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시합에서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끝까진 못했거든. 내가 그때까지 버티면, 공이 울릴 때까지 두발로 서 있을 수만 있으면,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록키> 중에서)

<록키5>가 쫄딱 망한 사실만큼 유명한 것은 스탤론의 <록키> 데뷔기다. 여느 무명 배우들처럼 오프 브로드웨이와 시시한 단역, 포르노를 오가던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를 찾아가 말했다. “저에게 괜찮은 복서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의향이 있으신지?” 시나리오를 읽은 간부들은 판권료로 30만달러를 제안했다. 그때 스탤론은 신혼이었다. 키우던 개 버키스를 판 돈까지 합쳐 수중에 106달러가 있었다. “나를 주인공 시켜주지 않으면 안 팔 겁니다.” 스튜디오는 생짜 무명을 주연으로 쓴다는 게 탐탁지 않았으나 계약은 맺었다. 주급 320달러, 수익의 10%를 받는 조건이었다. 2001년부터 조금씩 스며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이 제작 후기는 UA 마케팅 관계자들이 흥행을 위해 만든 가짜 이야기라고도 한다(자세한 내막은 박스 참조).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UA가 프로듀서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토프에게 준 제작비는 100만달러. 초저예산의 압박 속에 <록키>의 제작기간은 고작 28일.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권투시합 시퀀스를 연출한 사람은 스탤론 본인. 이탈리아계 혼혈의 가난한 무명 복서 캐릭터를 창조한 사람은 그 자신이 이탈리아계 혼혈인 스탤론 본인.

<록키> 연습 중인 스탤론

1976년 11월21일 <록키>는 뉴욕에서 소규모로 개봉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패하고 1년 뒤 겨울이었다. 시합에선 패하지만 승리에 다름없는 값진 결과를 낸 록키의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치환됐고 입소문에 힘이 실렸다. 영화는 2주 뒤 캘리포니아로 개봉이 확대됐다. 사람들은 무명의 영화음악가 빌 콘티가 작곡한 힘찬 주제가를 부르며 “네가 네 자신을 믿는 한, 너는 괜찮아”라는 대사를 외웠다. 미국 내에서 1억1700만달러의 입장수입을 거둔 것이 모자라서 더한 영예가 왔다. 카터 대통령의 영부인 로잘린 여사는 그와 함께 백악관에서 영화를 본 뒤 감동적이라 전했다. 커크 더글러스와 윌리엄 홀덴의 편지가 도착했다. 프랭크 카프라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라고 말해주었다. 헤비급 챔피언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가 스탤론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당신은 싸웠고 노력했다/ 의지가 강한 사내/ 록키는 위대하고 우리 모두는 당신, 스탤론을 사랑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록키>는 오스카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스탤론은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에 지명됐다. <록키>는 편집상, 존 G. 아빌드센의 감독상 그리고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그해 작품상 후보는 앨런 파큘라의 <대통령의 음모>, 시드니 루멧의 <네트워크> 그리고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 등이었다. 스탤론은 시상식 뒤 리셉션에서 자신이 존 웨인과 함께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더 믿을 수 없어했다. <뉴스위크> <뉴욕포스트>가 표지로 이 소식을 전했다. “DIY 영화, 오스카를 수상하다.”

육체의 야망,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오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좀 무서워. 링에서 계속 얻어터져서 너무 아플 땐, 상대가 내 턱을 날려주길 바라게 되지. 무감각해지게.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어. 한번만 더 해보자. 한 라운드만 더 뛰어보자. 지금은 절망적이어도 다음 라운드가 모든 걸 바꿔놓을 거야.”(<록키4> 중에서)

스탤론은 <록키>로 성공했고, 원작 소설의 비극적 엔딩을 고친 <람보>로 하늘 끝에 닿았다. 록키나 람보가 아닌 영화는 장르 불문하고 적은 환대를 받았으므로 스탤론은 정기적으로 록키나 람보가 되어 더 강한 적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하여 록키가 맞은 상대는 사납고 젊은 복서와 살인기계 등이었다. “나는 록키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록키가 투쟁과 분투의 나날들을 본낸 뒤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중략) 록키의 몸에 자부심이 커나가는 모습과 초인적인 위상이 반영되길 바랐다.” 람보는 바위를 깨부수고 맨손으로 절벽을 기어오르고 배에 박힌 총알을 그 자리에서 후벼팠다. “람보를 순수하게 육체적인 인물로 만드는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람보2>의 몸 만들기는 새로운 한계 설정을 의미했다. 내게는 단지 배역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최고에 오르는 개인적인 시험이었다. (중략) <람보3>는 시리즈 중 최고 야심작이었다. 더 강해져 있어야 했다.”

발전하는 스탤론의 몸은 곧 록키와 람보의 발전이었다. 그가 각본과 연출을 꾸준히 겸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일 만큼 육체의 성장 크기와 속도는 엄청났다. 록키의 순수한 뚝심과 근성이 퇴색되어간다든지 람보가 냉전시대의 선전도구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비판에 스탤론은 귀를 닫거나 화를 냈다. 그는 “내가 믿는 바”라면서 두 육체파 영웅이 지닌 순수한 이상만을 설파했다. (역시 영어가 이상하고 웃는 얼굴이 기묘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함께 스탤론은 8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근육질 스타였다. 둘은 친했다. 거기에 커트 러셀과 레이 리오타가 끼어 운동 팁과 사생활을 나눴다. 스탤론 육체의 파워와 의미는, 냉전 종식으로 <람보3>(1988)가 망하고 2년 뒤 엉망인 시나리오로 <록키5>가 버림받으면서 존재감을 잃었다. 무엇을 해도 그는 록키와 람보를 벗어날 수 없었고 비슷한 역할에서는 비교를 당했다.

2002년 <어벤징 안젤로> 이후 스탤론은 영화에 출연다운 출연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다이어트용 푸딩 제조회사를 차리고 건강과 성생활 정보지 <슬라이>를 창간하고 <실베스터 스탤론의 몸 만들기>라는 피트니스 가이드북을 썼다. 아마추어복서 대결을 소재로 한 리얼리티 쇼 <컨텐더>를 제작하고 WWE 관련 행사에 특별 게스트로 얼굴을 비췄다.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그는, 전성기 이후 꾸준히 관리해온 육체를 자기 열정의 자본으로 썼다. 이는 그 육체가 여전히 록키의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주민들은 그를 ‘록키’라고만 부른다. “록키 반가워요” “록키, 내 동생한테 사인 좀 해줄래요?” “헤이 록, 오랜만이에요!” 심지어 시장마저 “오늘 우리 시를 찾아주신 록키 발보아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팬들에게 록키는 실존 인물에 다름없는 전설이었고 스탤론에게는 분신이었다. 지지부진 떠나보낸 뒤 15년 내내 그는 괴로웠다. 깔끔한 매듭을 짓고 싶었다. 똑똑하거나 지적인 부류가 아닌 스탤론은 남달리 가진 것이 철근같은 의지와 그것으로 다스릴 수 있는 육체였다. 6편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삶이 있음을, 내가 원하면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남들이 뭐라 하든.

록키의 시합을 보고 싶으십니까?

“네 앞에 주어진 것들을 스스로 찾아낼 줄 알아야 해. 도망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그런 것들을 견뎌내지 못하면 너는 네 자신을 끝없이 소모하게 되는 거야. 네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일어서야 해. 시련은 누구나 겪는 거야. 그걸 헤쳐나가고 이겨낼 수 있을 때 너도 자존감을 갖게 될 거야.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록키 발보아> 중에서)

<록키 발보아>는 자전적이라는 점에서도, 불가능한 것에서 성취의 가능성을 보는 희망적인 주제를 가졌단 점에서도, <록키> 1편의 우직함과 순수함을 가장 닮아 있다. 스탤론은 틀림없이 마지막이 될 6편을 현실감있는 도전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상대선수 메이슨 딕슨 역에 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안토니오 타버를 캐스팅하고, 마지막 권투시합 시퀀스는 <HBO> 주최 복싱 타이틀매치장을 이용했다. 진짜 경기 관람을 마치고 나가려는 1만2천여명의 관중을 향해 스탤론은 외쳤다. “록키가 싸우는 걸 보고 싶으십니까?”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록키의 이름을 불렀다. 스탤론은 벅차하면서도 긴장했다. “그들은 돈을 받은 엑스트라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스탤론은 퇴물 록키였다. 사람들은 환호만 하지 않았다. 불만에 찬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스탤론은 타버와 액션 시퀀스를 짜놓지 않고 링에 올라선 터였다. 구두 합의만 있었다. 이 구석과 저 구석을 옮겨가고 펀치를 주고받자는 정도의 약속. 몇 개월의 훈련과 연습으로 스탤론은 발목과 목에, 타버는 손가락 관절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기준보다 두툼하게 패드를 넣은 글러브였지만 챔피언의 펀치는 셌다. 스탤론은 모든 펀치를 아프다고 느꼈다. 극중에서 록키는 세번 녹다운을 당하는데 두 번째 녹다운에서 후들리던 다리는 진짜였다. 세 번째 녹다운 때 스탤론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록키 발보아>

“늙은 록키는 이제 괴성 따위 지르지 않고도 젊은 시절의 좌절감을 다룰 수 있게 됐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바로 그의 육체를 통해서다. 록키는 항상 고통을 주고받는 일에, 해묵은 아픔을 새 아픔으로 씻어내는 일에 익숙한 사내였다.” 스탤론은 <록키 발보아>의 링 위로 한 사람의 건장한 육체가 이루었던 성공의 먼 훗날을 가감없이 세운다. 젊음이 떠난 자신의 육체, 지성이나 명예 대신 남은 그 육체의 최후의 한방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록키 발보아>는 일말의 기회도 이제 없을 록키의 마지막이자 스탤론의 육체에 종언을 고하는 영화다. 그 마지막 장을 스탤론은 스스로 썼다. 6편 제작 소식을 접한 존 G. 아빌드센 감독이 찾아와서 “내가 연출하고 싶다” 했을 때 스탤론은 이렇게 답했다. “아뇨, 제가 할 겁니다. 해서 모든 걸 망친다고 해도 제 책임이 되는 거니까요. 남 탓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게 쓰여진 마지막 장은 해피엔딩이다. 록키가 다시 자신감을 얻고, 남은 인생내내 그것을 가져갈 해피엔딩. 그리고 스탤론 자신은 더이상 왼주먹을 날릴 일이 없을 해피엔딩 말이다.

“이번 영화가 내 필모를 화려하게 해주진 않을 것이다. 내가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최대치가 그것이었다고 말할 정도나 되겠지. 그리고 난 은퇴할 테고. 연출을 하고 싶다. 우리 나이 남자들이 분장을 하고 악당들에게 총질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아놀드가 그러더라.”(실베스터 스탤론)

저 푸른눈에 금발 청년이 록키 맞습니다

<록키> 비하인드 스토리의 비하인드 스토리

대부분이 아는 <록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렇다. 무명의 실베스터 스탤론이 UA를 찾아갔다. 본인의 시나리오를 놓고 판권 계약에 주연 캐스팅을 조건으로 걸었다. 간부들이 승낙했고 영화가 제작에 들어갔다.

이 비하인드 스토리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렇다. 1974년 <브룩클린의 아이들>을 찍고 나서 스탤론은 래리 큐빅이란 에이전트를 통해 진 커크우드라는 프로듀서를 소개받는다. 커크우드는 스탤론의 시나리오 두편를 맘에 들어하며 새 시나리오를 구상해보자고 했다. 스탤론은 택시 운전사가 필라델피아 시장이 되는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었다. 커크우드가 고개를 젓자 무하마드 알리와 경기를 치르는 복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커크우드는 후자를 점찍고 마음속으로 말론 브랜도를 떠올렸다.

커크우드는 스탤론의 80페이지짜리 트리트먼트를 들고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토프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맘에 들어했다. 시나리오 작업은 6개월 정도 계속됐다. 그때 마침 차토프-윙클러 콤비는 UA와 계약 갱신 중이었다. 1년에 6편씩 영화를 공급한다는 연간계약. 100만달러 미만이면 윙클러-차토프에게 프로덕션의 모든 권한이 있고 UA는 고문 역할만 하는 것이었다. 그 조항이 <록키>를 만들 구실이 됐다. 두 콤비 프로듀서는 갱신계약 첫 작품으로 권투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당시 UA 사장이던 에릭 프레스코프에 따르면 “첫 계약으로 내미는 게 장사도 안 되는 권투영화”여서 모두가 놀랐다. UA는 승산 가능성 높은 <뉴욕, 뉴욕>을 <록키>와 묶음계약했다. 윙클러-차토프는 굳이 주인공이 스탤론이 아닐 필요는 없어 그와 작업을 시작했다. UA는 <록키>의 주인공 얼굴을 몰랐다.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일 때 UA의 임원진들이 주인공을 궁금해했다. 윙클러와 차토프는 <브룩클린의 아이들> 테이프를 보냈다. 내부 시사 중에 UA의 회장 아서 크림이 물었다. “누가 스탤론인가?” 각종 유색인종과 라틴계 젊은이들이 떼지어 나오는 영화였다. 그중 유일한 금발 청년을 누군가 가리키며 “저 친굽니다”. “이탈리아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요즘 남부 이탈리아에 가보면 금발에 푸른눈이 많습니다.” “그렇군. 괜찮구먼.” <록키>의 시사 테이프가 UA에 도착했을 때 임원진은 영화 초반 스탤론의 얼굴을 보며 ‘록키는 언제 나오나’ 궁금해했다.

대부분이 아는 <록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당시 UA 마케팅 담당자였던 프레드 골드버그와 게이브 섬너가 지어냈다 한다. “스탤론에게 영화를 옆구리에 끼고 신문사든 잡지사든 찾아가라고 했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스튜디오라는 것들이 말이에요 어쩌고 저쩌고’ 식으로 말이다.” 버트 영(폴리 역), 버제스 메레디스(미키 역), 칼 웨더스(크리드 역)까지 인터뷰를 잡았는데 스탤론의 인터뷰가 잡히지 않아 마케팅 관계자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할리우드 투데이>의 객원필자 알렉스 벤 블록이 지난해 12월20일, 자신이 UA 관계자들을 만나 30년 전 정황을 듣고 써서 올린 긴 기사의 일부다. 이 기사가 공개된 당일, 스탤론쪽은 “실베스터 스탤론의 이야기는 정확한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사진제공 도서출판 사람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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