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파리에서 사랑에 빠지거나, 파리와 사랑에 빠지거나
2007-02-16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파리에서는 누구나 사랑에 빠진다.’ 세계적인 감독들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사랑해, 파리>는 이처럼 대책없이 낭만적인 문장을 새기며 시작한다. 진짜 파리 사람들이 듣는다면 피식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파리의 여행자들에게 이런 꿈을 꿀 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진짜 여행보다 달콤하고 진짜 풍경보다 더 로맨틱한 파리의 영화들을 보며 잠시 사랑에 빠져보는 것도,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

1. 모든 길은 에펠탑으로 통한다

<파리의 연인들>

에펠탑은 파리에 대한 영화에서 일종의 필요조건이자 출발점이다. <파리의 연인들>처럼 파리를 조망하는 영화들의 시작점이고, <섹스 &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아침에 눈떠 호텔 창밖으로 에펠탑을 보면서 파리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는 여행자들의 출발 지점이다. 또 <파리가 당신을 부를 때>의 미키(빌리 크리스털)가 앨런(데브라 윙거)과 첫 데이트를 하는,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프랑스에 시신을 묻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에 따라 파리로 와서 장례를 마친 미키는 프랑스 항공사 직원 앨런과 데이트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즉흥적인 파리관광을 계획한다. 파리에 대해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던 사람에게도 에펠탑은 언제나 흔쾌히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래도 파리에 왔는데 에펠탑은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에펠탑에서 루브르로, 개선문에서 센강으로 걷는 사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동정 없는 세상>의 이포(이폴리트 지라르도)가 에펠탑 앞에서 했던 행동은 파리여행을 준비하는 바람둥이들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그는 데이트할 때면 자정 무렵 에펠탑의 불이 꺼지는 순간 손가락을 튕겨서 마치 불을 끄는 듯한 동작으로 여자들의 환심을 샀다. 하지만 진짜 파리 여행자들은 섣불리 이포를 따라하지 말 일이다. 시간에 맞춰 아무리 손가락을 튕겨도 까딱 않는 에펠탑을 보면서 <증오>의 우울한 파리 외곽의 청춘들처럼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 사회적인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느낄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말이다.

2. 키스를 부르는 센강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에펠탑이 여행의 출발점, 연애의 ‘발단’이라면 센강은 여지없이 ‘전개’에 해당하는 곳이다. 연인들은 벼르기라도 한 듯 어김없이 센강가나 센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 위에서 키스한다. 파리 구경하기의 초보단계에 해당하는 <파리가 당신을 부를 때>에서 에펠탑부터 루브르, 개선문까지 찍고 턴한 남녀가 센강가에서 자연스럽게 키스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인 센강의 러브신 주인공을 꼽자면 시작하는 연애가 아니라 오랜 시절 잊혀진 연애를 감미롭게 반추하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의 스테피(골디 혼)와 조(우디 앨런)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연인으로 만나 부부 사이를 지나 친구로 안착한 두 사람은 스테피의 현 남편이자 조의 친구가 감기로 앓아눕는 바람에 파리에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왔던 이곳에서 옛 추억에 사로잡혀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노래하며 춤추다가 스테피가 마법처럼 검은 드레스를 부드럽게 휘날리며 둥실 하늘로 떠오른다.

진 켈리의 <파리의 미국인>을 패러디한 이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쩍 가슴을 저민다. 센강은 그들이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흐르는데, 하늘에 떠오른 옛 연인처럼 세월은 더이상 그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사랑은 그런 거라고, 늙은 감독의 지혜를 전하는 센강은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답다.

3. 사탕으로 만든 언덕, 몽마르트르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함에 비할 수도 없고, 지적이면서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생제르맹 데 프레를 따라갈 수도 없다. 이제는 그 이름마저 닳고 닳아 마치 옛날 달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행자들의 설렘을 가장 많이 담은 곳은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이 설렘이 꼭 여행자의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멜리에>다. 이 영화의 시선은 동화적이다. 그래서 히스테릭한 엄마와 무심한 아빠 사이에서 평생을 외롭게 살아오며 ‘소외받고 버림받은 자들의 대모’를 자처하는 아멜리에(오드리 토투)의 일상이 쓸쓸하기보다 사랑스럽고 달콤하다.

<아멜리에>

아멜리에는 아파트의 작은 방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두개의 풍차’까지 매일 몽마르트르 언덕의 좁은 골목길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아파트에는 부서지기 쉬운 뼈를 지닌 ‘몽마르트르풍’ 늙은 화가와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수다스런 여자가 살고 있다. 또 아파트 아래에는 과일가게와 어딘가 모자란 듯한 가게 점원, 점원을 구박하는 못된 주인이 있다. 보이지 않게 동네 구석구석 훈수 두는 아멜리에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꿈같은 동화의 무대로 바꿔놓는다. 사랑에 빠진 남자와 놀이공원에서 벌이는 숨바꼭질과 회전목마 사이로 보이는 사크레 퀘르 사원의 둥근 지붕,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그 지붕 뒤로 펼쳐지는 코발트색 하늘은 가장 낭만적인 영화 속 파리의 풍경이다.

4. 에스프레스보다 검고 쓴 퐁네프 다리 아래

<퐁네프의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은 아마도 가장 높은 체열을 지닌 파리의 영화일 것이다. 물론 이 뜨거운 온도가 90년대 초 한국의 젊은 관객에게 파리에 대한 로망의 극한을 심어준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 반응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파리에 온 일본인 관광객 일부가 그 환상이 깨지는 충격으로 고생한다는 ‘파리 신드롬’의 원흉으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는 파리에는 많지만 파리를 그린 영화에는 별로 없는 부랑자들의 이야기다. 공사 중인 퐁네프 다리에서 지내던 부랑아 알렉스(드니 라방)은 다리 한가운데 쓰러져 있던 또 한명의 부랑아 미셸(줄리엣 비노쉬)을 발견하고 둘은 퐁네프 다리에서, 다리 아래 흐르는 센강 주변에서 열병 같은 사랑을 나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파리의 풍경은 파리를 다룬 여느 영화들과 다르다. 고상하고 기품있는 도시의 정서를 흩뜨리는 에너지의 발현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의 존재를 기묘한 역설로 만들어버린다. 프랑스혁명 200주년 축제 때 폭죽을 그림물감 삼아 밤하늘에 그림을 그리면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경찰의 순찰보트를 훔쳐 센강을 질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여행자가 꿈꿔온 파리와는 다른 풍경이지만, 그래서 더욱 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 장면과 함께 자신의 본래 세계로 돌아간 미셸이 방화범으로 감옥에 갔던 알렉스와 크리스마스이브에 흰 눈발을 맞으며 다리 위에서 재회하는 장면 역시 여행자로 하여금 퐁네프 다리에 서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감각적인 풍경이다.

5. 미국에는 없는 파리의 카페들

<비포 선셋>

“왜 미국에는 이런 카페가 없는 거지?” 파리의 뒷골목에 있는 카페 ‘르 퓌르’에 앉자마자 제시(에단 호크)는 말한다. 6개월 뒤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재회하자던 약속은 지워지고 9년 만에 파리에서 제시를 만나 셀린(줄리 델피)은 제시의 말에 공감한다. 멋진 실내장식 대신 2인용 사각탁자들이 조금씩 열과 오를 이탈해 제멋대로 놓인 파리의 카페는 무심한 듯 사람을 서로 다가가게 만든다. 영화에서 프랑스인들은 카페에서 만나 쉬지 않고 이야기한다.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와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셋>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도 카페에서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하는 등장인물일 것이다.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열린 제시의 출판기념 행사를 찾은 셀린과 갑작스러운 조우에 놀란 제시는 어색하고 과장된 안부인사를 하면서 거리를 걷다가 이 카페에 들어온다. 국제정치에서 오럴섹스에 대한 농담까지 거침없이 쏟아지는 카페에서의 대화는 붕 떠 있던 둘의 자리를 딱딱하지만 안락한 카페 의자로 안착시킨다.

6. 켈리백에도 저마다 운명은 있다

파리의 루이비통 매장이 한국인과 일본인들로 미어터진다는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화려한 패션과 쇼핑은 파리가 여행자를 유혹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하물며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던 <섹스 & 시티>의 사만다(킴 캐트럴)의 자존심조차 구겨버렸던 켈리백으로 유혹하는 파리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있나.

<프렌치 아메리칸>

<프렌치 아메리칸>에서 프랑스인과 결혼한 언니(나오미 왓츠)의 두 번째 출산을 돕기 위해 파리에 온 이사벨(케이트 허드슨)은 언니를 막 떠난 형부의 삼촌인 중년의 에드가(티에리 레르미트)에게 켈리백을 선물받는다. 50대 남성의 부와 명예, 그것에 걸맞은 품위와 여유, 프랑스인 특유의 세련된 감각과 청년 못지않게 잘 다듬어진 몸매,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남자는 이사벨에게 파리 자체다. 이사벨은 매력적인 중년의 파리지앵 에드가와 퐁피두센터의 고급 레스토랑 조르주에서 밥을 먹고 오페라를 보면서 프랑스 귀족의 삶을 즐긴다. 어느새 그녀는 프랑스에서 5년을 산 언니보다 더 우아하게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줄 아는 파리지엔이 되어간다. 이사벨의 연애는 여행자가 꿈꿀 수 있는 파리에서의 최고의 로맨스다. 물론 이는 불륜이나 스캔들에 너그러운 프랑스인들의 태도가 전제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켈리백으로 시작된 연애는 고급 스카프 선물로 마무리되고, 바람둥이 에드가는 전에 만났던 여인들에게 했듯이 “꽃이 시들 듯이 영웅도 잊혀진다”는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며 이사벨을 떠난다. 이사벨의 삶과 무관했던 켈리백이 결국 그녀의 손을 떠나듯이 여행은 끝나고 언젠가는 집에 돌아와야 하게 마련이다.

7. 예술의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은 무엇으로 사나

‘파리는 예술의 도시다’라는 말은 ‘개의 다리는 네개다’라는 말만큼이나 명료하고 지루하다. 예술에 문외한이라도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화가 고흐나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던 사티, 압생트를 마시며 어두운 극장에서 붓을 놀리던 로트레크를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러나 이처럼 시간 속에 박제된 예술의 도시 파리는 아름답지만 낡았다. <파리의 연인들>에서는 20세기 초 몽마르트르의 풍경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예술적 영감과 이 못지않은 예술의 속물성으로 가득찬 21세기 파리 예술가들의 풍경을 슬쩍 엿볼 수 있다.

<파리의 연인들>

여배우 카트린느(발레리 르메르시에)는 돈과 인기를 거머쥐었지만 ‘하잘것없는’ 연속극 주인공에 머무른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프랑스 고전 작가인 페이두의 연극을 준비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장 프랑수아(알베르 뒤퐁텔)는 연주여행과 인터뷰로만 짜인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평생 엄청난 양의 미술품을 수집한 돈 많은 중년의 자크(클로드 브라르)는 자신의 컬렉션을 경매에 부치려고 한다. 이들이 작업하는 극장 앞 카페에서 일하는 시골 처녀 제시카(세실 드 프랑스)는 파리의 예술가들이 비탄에 빠지고, 때로 이중적이며 또 때로는 여염집 사람들처럼 소박한 친절을 베푸는 일상을 관찰한다. 명망있는 영화감독에게 아부하며 다른 배우를 향해 질투어린 악담을 퍼붓는 카트린느의 속물 근성이 이 겉치레 많은 예술도시에 톡 쏘는 쾌감을 선사한다면 예술품을 보는 안목에 대한 우월감이 덧없는 것임을 깨닫는 노년의 수집가의 모습은 박제되지 않은 예술도시 파리의 진심을 열어 보인다.

8. 파리의 산책자 또는 여행자들

<비포 선셋>

작가 에드먼드 화이트는 <게으른 산책자>에서 “프랑스에서 산책자는 오랜 전통을 가진 이름”이라고 산책을 예찬한다. 영화에서 이따금 배를 탄 여행자를 볼 수는 있지만 파리에서 차를 타고 움직이는 여행자들은 찾아볼 수 없다. 파리는 산책자들의 도시다. 9년 만에 만난 서먹한 커플이 산책하면서 서로 어색함을 푸는 <비포 선셋>의 남녀처럼 파리의 연인들은, 여행자들은, 파리지엔과 파리지앵들은 무수히 많은 공원과 뒷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중년의 미국 관광객 캐럴(<사랑해, 파리>의 ‘14구역’, 마고 마틴데일)도 홀로 파리를 걷는다. 덴버에서 우체부로 일하는 그녀는 늘 꿈꿔왔던 파리 여행을 위해 2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고 마침내 파리에 왔다. 비록 전체 일정 6일 중에 5일을 시차로 고생했지만 캐럴은 미술관과 에펠탑,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묻힌 몽파르나스 묘지 등을 홀로 소요한다. 공원에서 역시 혼자 샌드위치를 먹던 그녀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직장도 친구도 없는 이곳 파리에 홀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죠. 그리워하며 기다렸던 것들,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잊고 지냈던 것들이거나 평생 깨닫지 못한 것들이겠죠.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동시에 기쁨과 슬픔을 느꼈다는 것,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아요. 전 살아 있거든요. 그 순간 파리와 사랑에 빠졌죠. 파리도 저와 사랑에 빠졌고요.” 여행자들은 그렇게 낯선 도시 파리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리웠던 집에 도착하는 순간 다시 파리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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