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황금곰의 파티가 시작됐다, 제5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
2007-02-12
글·사진 : 오정연

해가 빛나고 있음에도 흐린 날씨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점잖은 무채색의 도시, 베를린의 첫인상은 음산하고 우울하다. 서울에 비해 그리 기온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옷깃을 파고드는 추위가 이방인을 맞이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편견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이 음울한 도시 역시, 무뚝뚝한 표정 속에 친절함을 감춘 이들로 가득하다. 개막을 앞둔 준비에 여념이 없는 영화제 관계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꼼꼼하게 보고 싶은 영화를 체크하여 줄을 늘어선 일반 관객은 진지하지만 들뜬 기색이 역력하다. 행사장 주변 곳곳의 기둥마다 베를린영화제의 상징인 붉은 곰 문양을 새기는 이들의 신중하고 분주한 손길에선 차분하게 축제를 기다리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정치적이지 않은 시대에 정치성을 고수한다는 것

부동의 최고 자리를 고수하는 칸, 지난해 눈에 띄게 화려한 라인업을 선보인 베니스와 겨뤄야 하는 베를린의 올해 경쟁부문 라인업은 다소 초라한 것이 사실이었다. 빌 어거스트(<굿바이 바파나>), 로버트 드 니로(<굿 셰퍼드>), 이리 멘첼(<나는 영국국왕의 하인이었다>), 프랑수아 오종(<천사>), 자크 리베트(<도끼에 손대지 마라>), 스티븐 소더버그(<굿 저먼>), 앙드레 테시네(<증인>) 등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긴 하지만, 세간의 이목을 확실히 끌 만큼 새롭고 궁금한 작가의 신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편 올해 베를린 경쟁부문의 특징은 언제나처럼 ‘정치’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23편의 경쟁작 중 2차대전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은 영화는 전대미문의 화폐위조사건을 소재로 한 <화폐위조자>(슈테판 루조비츠키)를 포함하여 3편이고,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소재를 택한 영화는 레바논 남부에 주둔했던 이스라엘 부대에 카메라를 들이댄 <보포트>(조셉 세다), 1990년대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연쇄사인사건을 영화로 옮긴<보더타운>(그레고리 나바), 브라질 군사독재 시절을 축구광 소년의 일화를 통해 살핀 <부모님이 휴가를 떠난 해>(Cao Hamburger) 등 다섯편이다.

그러나 베를린의 정치적인 성향은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니다. 임기 6년차에 접어든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디터 코슬릭은 “더이상 정치적이지 않은 시대정신 속에서 정치적인 영화제를 고수하는 것은 훨씬 힘든 일”이라는 말로, 오랜 전통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시사했다. 정치적인 올바름만을 지나치게 고수하는 성향으로 인해 비판받아왔던 그는 “집행위원장을 맡은 첫해 영화제는 9·11의 그늘 속에서 열렸고, 다음해 임기 중에는 이라크전이 일어났다.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고, 나는 이것을 반영해야 했다”고 자신의 임기를 회고했다. 한편 지난 1월 중순, 영화제의 성장을 증명하기 위해 행사장을 찾을 만한 스타를 돈으로 사고, 월드 프리미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유로 작은 구설수에 휘말렸던 그는 이를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23편 중 17편에 달하는 월드 프리미어 작품 수에 대해서 “월드 프리미어라는 말 자체는 결국 마케팅 장치에 불과하다. 월드 프리미어보다는 좋은 작품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1200편에 달하는 경쟁부문 출품작 중에서 이루어진 선택에 대해서는 “정치적이었고 정당했다. 우리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산업과 대중을 함께 고려하여 영화제를 프로그래밍한다”고 덧붙였다.

개막작 <장미빛 인생>

우려든 확신이든, 시작하지 않은 영화제를 향한 모든 선입견을 거두고 나면, 영화제가 열리는 포츠담광장 베를린 팔라스트와 그 주변에선 57번째 행사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축제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개막을 하루 앞둔 2월7일. 현지의 주요 유력 일간지들은 2월6일 예매를 시작한 티켓 박스 앞에 장사진을 친 관객의 사진을 실었고, 개막작인 <장밋빛 인생>을 포함하여 <굿 저먼> 등 경쟁부문 화제작의 이른 매진 소식을 전했다. 160여편의 각종 프리미어 상영작, 4천여개 매체에서 파견된 1만9천명의 프레스, 5천여명이 참석하여 700편 이상이 선보이는 마켓 등 숫자가 보여주는 영화제의 객관적인 규모 또한 화려하다. AFM이 가을로 옮겨가면서 지난해부터 눈에 띄게 활기를 띠게 된 유러피안필름마켓(EFM)의 성장세는 여전하고, 저개발국의 영화감독을 지원하기 위해 2004년 시작한 월드시네마펀드(WCF)는 그간 53개국 522개 프로젝트를 소개하여 32편의 영화가 제작 및 배급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지속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유망한 감독과 제작자가 해외 투자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되어준 베를린영화제 코프로덕션마켓은 2월11일부터 13일까지 25개국 37개의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의 장이 되어줄 예정이며 이중에는 조 단테, 사라 폴리, 왕차오의 신작 등이 포함되어 있다. 빔 벤더스, 지아장커 등이 세계 각국 젊은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베를린 탤런트 캠퍼스 또한 눈길을 끈다.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 커

각종 부문에 걸쳐 다양한 아시아영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 또한 올해의 특징이다. 4편의 경쟁작을 포함하여 총 21편의 아시아영화가 상영되는데, 이중 한국영화는 9편에 달한다. 조선족 감독 장률의 신작 <히야쯔가르>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경쟁부문에 포진한 가운데,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과 한국과 미국 합작영화로 알려진 니키 S. 리 감독의 <A.K.A. 니키 S. 리>가 포럼부문에,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와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파노라마 부문에 이해영·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와 여인광 감독의 <아이스케키>가 제너레이션 부문에 각각 초청됐다. 베를린의 격주간 문화지 <팁 베를린>은 올해 베를린을 찾은 한국영화를, 프랑스영화와 같은 분량인 1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온 영화, 극단적인 팝모던, 초현실주의적인 가족 이야기, 영민한 작가영화”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아주 특별한 손님>을 임권택 감독의 <축제>와, <해변의 여인>을 홍상수 감독의 전작 <극장전>과 비교하며 설명하기도 했다. <버라이어티>가 발행하는 영화제 공식 데일리의 첫호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커버로 장식했고, <아주 특별한 손님>과 <후회하지 않아>의 리뷰를 크게 실으며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한편 <히야쯔가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함께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세편의 아시아영화 중 하나인 <로스트 인 베이징>(리유)은 섹스장면과 도덕성 문제로 인해 중국 정부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등의 뉴스가 영화제 데일리를 통해 들려온다. <로스트 인 베이징>의 제작사는 영화의 완본은 정부의 검열을 필요로 하지 않는 EFM을 통해 상영하고, 현재와 다른 버전으로라도 15일에 있을 영화제 공식상영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아무도 결과는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영화는 현대 베이징을 살아가는 이들의 욕망과 공포를 다루고 있다.

크고 작은 뉴스를 뒤로하고, 현지시각 2월8일 오후 7시45분.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다룬 <장밋빛 인생>(올리비에 다한)을 상영하면서, 제57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11일간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차가운 외향과 달리 밝은 미소를 간직한 현지인들처럼, 거대한 국제영화제의 딱딱한 첫인상 역시 크고 작은 좋은 영화의 힘으로 따뜻하게 변모해갈 것을 기대해본다.

“정치는 일상 속에 있는 것”

폴 슈레이더 등 심사위원단 7인의 인터뷰

시나리오작가 출신 감독 폴 슈레이더가 이끄는 올해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단은 모두 7명. 이중 배우는 각각 <수면의 과학>과 <천국을 향하여>로 베를린을 찾았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히암 아바스, 독일의 국민배우 마리오 아돌프, 비경쟁부문에 초대된 <더 워커>에서 폴 슈레이더와 함께 작업한 윌렘 데포 등 4명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를 제치고 영화제 개막일 오전에 진행된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주인공은 홍콩의 프로듀서 난순 시였다. 당일 거의 모든 영화제 데일리가 <로스트 인 베이징>의 행방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아시아영화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심사위원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을 이끌고 앞으로 10일 동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가.
=폴 슈레이더: 우리 모두 함께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87년 심사위원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심사위원실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고함을 지르면서 난리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웃음)

-<로스트 인 베이징>과 관련하여 어떻게 예상하는가.
=난순 시: 확실한 건 우리는 우리가 보게 될 버전으로 심사를 진행한다는 점이다. 사실 전세계 어디에나 검열은 존재한다. 홍콩영화에는 4개의 등급이 존재하지만 중국은 하나뿐이다. 검열을 통과하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다. 우리 정부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겪고 있고, 이런 방식의 검열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정부가 좀더 합리적인 영화등급을 고민할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 영화를 연출했다고 들었다. 배우 혹은 감독, 어떤 입장에서 심사에 임할 예정인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굳이 말하자면 구경꾼의 입장이다. 원래 나는 배우나 감독보다는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고, 그런 면에서 심사위원일도 나와는 잘 맞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영화를 심사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흥분된다.

-좋은 영화는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히암 아바스: 음, 정치는 일상 속에 있기 때문에 정치와 그 무엇도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잠시 침묵) 대답이 짧아서 미안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취재협조 황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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