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우기 좋은 날은 몰라도, 바람피우기 좋은 놈은 있다. 불륜 9단의 급수를 가진 유부녀 선수에게 상대는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어리버리 대학생이다. <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김혜수의 손바닥 위에 놓인 이민기는 청춘의 가벼움을 퐁퐁 뿜어내며 한껏 애교를 발산한다. 공교로운 타이밍의 일치. 그는 현재 드라마 <달자의 봄>에서도 33살 노처녀로 등장하는 채림과 애정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85년생 이민기에겐 어느새 ‘누나들의 로망’, ‘대표 연하남’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주변에서 그런 말들을 많이 하시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 어떤 누나가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고. (웃음)”
지난해 우정출연으로 잠깐 얼굴을 비쳤던 <뚝방전설>을 제외한다면, <바람피기 좋은 날>은 사실상 이민기의 첫 번째 영화이자 첫 주연작이다. “오디션에서 대본 리딩을 하게 됐어요. 첫 대사가 “2학년이에요”였는데, 말을 못하겠는 거예요. 너무 답답해서 거의 눈물을 보였었어요. (웃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 재차 찾아가서 결국 역할을 따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뒤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검색창에 ‘김혜수’를 치니까 데뷔작이 86년작 <깜보>더라고요. 제가 돌 때부터 연기를 하신 분인 거예요. (웃음) 내가 누나를 어떻게 만지지, 정말 엄두가 안 났었어요.” 낯 뜨거운 장면들을 자연스레 표현하기 위해 “불법영상”들을 보며 준비(?)를 하기도 했다는 이민기는 자신의 연기가 우연에 의해 좌우된 순간이 많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바지가 안 벗겨져서 낑낑대는 장면도, 제가 한 게 아니라 바지가 한 거예요. 리허설 때 잘 벗겨지던 바지가 슛 들어가니까 이상하게 안 벗겨지더라고요. (웃음)”
김해가 고향인 이민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친구들과 돈 모아 포장마차 하나 차리는 것”이 목표였다. 미래의 동업자들이 하나둘 부모님 설득으로 대학을 향하면서 그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점수에 끼워맞춰서 대학을 가기는 정말 싫었어요. 뭘 할까, 생각하다가 모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모델 에이전시 게시판에 올려놓은 사진이 대표의 눈에 띄어 연락이 닿았다. “그러다 섬에 잡혀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뒤로하고 무작정 상경했고, 이민기는 거짓말처럼 모델이 됐다. 1년여가 지난 2004년,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드라마시티>에서 사투리를 하는 배우를 찾았어요. 원래는 동원이 형(강동원)에게 들어온 역할이었는데, 사장님이 사투리도 잘하고, 엄청 웃기는 애 있다고 저를 추천해주셨어요.” 얼떨결에 연기 데뷔전을 치른 뒤엔 일일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고정 출연을 따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사투리가 걸림돌이 됐다. “원래는 서울말을 한다는 설정이었죠. 근데 제가 애매하게 하니까 시청자가 쟤 정체는 뭐냐, 게시판에 항의글을 올렸어요. 나중에는 아예 작가 선생님이 캐릭터 설정 자체를 바꾸셨더라고요. 어렸을 때 시골에 보내져서 말투가 변한 것처럼. (웃음)” 볼펜을 입에 물고, 한자 한자 신문을 읽어가며 말씨를 교정하던 이민기는 드라마를 마친 뒤 곧장 베스트극장 <태릉선수촌>에 출연하게 됐다. 일일연속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작품이었지만, 철없고 겁없는 국가대표 유도선수 ‘홍민기’는 이민기의 열혈 팬들을 만들어냈다. “놀라운 순간들이 많았어요. 나도 모르게 감정에 벅차서 눈물이 툭 떨어졌던 적도 있고요. ‘나, 연기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된 것 같아요.”
시트콤 <레인보우 로망스>에서 드라마 <진짜진짜 좋아해>의 주인공으로,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다시 영화의 주연으로, 이민기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고 칭하는 그는 “솔직히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털털하게 이야기한다. “제일 힘든 건 육체적인 피로도, 다른 사람들의 비판도 아니에요. 나 스스로 ‘나 정말 못한다’고 인정하게 될 때가 제일 힘들어요. 배우가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요.” 이민기는 행운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는 중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다져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