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조용하지만 단단한 발걸음,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서장원
2007-02-19
글 : 오정연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서장원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늦가을. 하정우 등 <용서받지 못한 자>에 출연한 학교 선배들과 함께한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유난히 서열이 엄격한 연극영화과에서 네 학번 이상씩 차이가 나는 선배들 틈이었으니, 영화 속 소심한 승영 못지않은 조용함을 선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상적인 것은, 그의 과묵함이 선배들의 눈치를 보는 후배의 주눅든 모습이 아니라 특유의 진지함이 발휘된 결과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무리의 틈에 조용히 섞여들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는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남짓. 민병훈 감독의 신작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 그는 여자친구를 버리고 신학생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지만 부모의 병세, 여자친구의 죽음, 그리고 그 여자친구와 똑같은 외모를 지닌 수녀와의 만남 등으로 갈등하는 수현을 연기했다. 승영과 마찬가지로 수현 역시 주관이 뚜렷하고,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망설이고, 어떤 변화를 겪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며, 또 선택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고, 스스로를 직접 변명하지 않는다. 작은 체구에 눈에 띄지 않는 외모, 그리고 유약한 인상 속에 감춰진 어떤 결심. 수현과 승영, 이들을 연기한 서장원은 그처럼 유사한 궤적을 그린다. 그러나 단정은 금물이다. 비슷한 인상의 수현과 승영이지만, 두 영화의 결말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스크린을 벗어난 서장원에게선 단단함과 순진함이 동시에 엿보이곤 한다. 성급하지 않고 신중하게, 첫걸음을 내딛는 또래 배우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템포로, 그는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

“무서운 선배일 것 같다고요? 처음에 낯도 많이 가리고 상대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편이고, 잘못한 게 있으면 지적하는 선배이다보니 아무래도 후배들이 다가오기 어려워하는 것 같기는 해요. (웃음) 고등학교 때도 조용한 편이긴 했어요. 뭣보다 잠을 굉장히 많이 잤죠. (웃음) 하지만 이래봬도 술 마시는 걸 좋아해요. 주량도 소주 세병 반 정도로 적지 않은 편이고. 워낙 술이 잘 받는 체질이기도 하지만 대학 들어가서 선배들과 술자리를 많이 갖다보니까 더 늘더라고요. 하하. <포도나무를 베어라> 시나리오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개봉을 앞두고 한참 인터뷰를 하고 다닐 무렵 받았어요. 예상치 못했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아버지(서인석)가 연기자라는 사실도 알려지고, 좀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죠. 이렇게 뜨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게 아닐까 싶은 부담감도 있었고요. 함께 출연했던 (하)정우 형, (윤)종빈 형과 농담처럼 ‘이 영화로 칸 가는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정말 칸영화제도 가게 돼서 감개무량하기도 했죠. 드라마 같은 데 출연하면 얼굴은 널리 알려지겠지만 작품이나 캐릭터를 선택할 때 신중하고 싶었어요. 아직은 경험을 더 쌓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쨌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른 데뷔였고, 당시에는 아직 20대 초반이었으니까. 그런데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처음엔 시나리오가 어렵게 느껴졌지만, 잔잔한 디테일이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군대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는 소심한 승영(<용서받지 못한 자>)이나 고민을 거듭하는 우유부단한 신학생 수현(<포도나무를 베어라>)이나 변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비슷하죠. 하지만 군대에 끌려오고, 그 안에서 변화를 겪는 승영과 달리 수현은 구도자로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힘겹고 어려운 국면을 이겨내려는 성숙한 캐릭터예요. 마지막에 수현의 선택이 정확히 무엇인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저는 수현이 신학교로 돌아간다고 가정하고 연기했어요. 소중한 무언가를 잃고도 그 상실감을 극복한 뒤 더욱 큰 것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영화 속에서 기도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꽤 오랜만에 진실된 기도를 하기도 했죠. 기도를 거짓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동안 나가지 않던 교회도 나가게 됐어요.

다음 계획이요? 일단은 민병훈 감독님의 차기작에 출연할 텐데, 향기에 대한 영화라는 것밖에는 몰라요. 호스트바를 배경으로 하는 차기작을 준비 중인 윤종빈 감독님은 분량은 적어도 인상적인 카메오로 캐스팅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계속해서 진지하고 말수가 적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뭐, ‘진지전문배우’가 될 생각은 없어요. (웃음) 조만간 제가 가진 다양한 모습을 선보일 만한 좋은 배역을 만날 수 있겠죠. 학교 다닐 땐 코믹한 캐릭터로 연극무대에 서기도 했고, 반응도 좋았어요. (진지하게) 정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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