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민병훈 감독의 말에 따르면,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에서 이어진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을 종결하는 작품”이다. 신과 옛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던 신학생 수현은 자신의 고통을 비추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더욱 깊은 두려움에 직면한다. 전작 이후 신작을 내놓기까지 4년이란 시간 동안 민병훈 감독 역시 겹겹의 두려움과 마주해야만 했다. 타지키스탄으로 날아가 일반인을 배우로 기용하여 만들었던 데뷔작 <벌이 날다>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그것은 곧 민병훈 감독을 영화제용 영화만 만드는 사람으로 각인시켰다. “정말 속상했다. 나는 절대 영화제를 위해서 영화를 만들려고 한 적이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느 감독이 그러겠나. 보편성을 획득하고 싶었고, 때문에 그곳에서 생겨난 아이디어는 그곳에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개봉을 앞둔 현재의 그는 각고의 시간을 거쳐 삶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 그의 인물들처럼 뜻밖의 선물을 발견한 듯 보였다. “가끔 내 작품을 따스하게 안아주며 위로할 때가 있다. 물리적인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태도에 의해서 탄생한 결과물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괜찮아, 울지마> 이후 차기작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에만 집중했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선뜻 제작에 나서는 분들도 없었고, 투자도 힘들었기 때문에 계속 돈을 구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제작 시스템을 논하기 이전에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게 숙원사업 아닌가. 시스템을 나 혼자 바꿀 수도 없는 거고. 시스템만 탓하다보면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아 어떻게든 작품을 만들어보려 하다보니 4년이 걸렸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들었다. 어떤 경험이었나.
= 아르메니아를 여행할 때였는데, 한 늙은 촌부가 자신의 차에 나를 태워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촌부의 아내가 찾아와 남편이 아프니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더라. 나는 끌려가듯 가서는 기도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난 지금 나의 분신을 보는 것 같다. 넌 과거의 나인 것 같다”고 하더라. 주술적이고 기이한 상황이지만, 나는 우선 두렵기부터 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왜 두려울까 싶더라. 또 다른 민병훈이 존재한다면, 또 똑같이 그런 존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울은 언뜻 한 가지 모습만 비추는 것 같지만 사실 수만 가지 상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수만 가지 상 가운데 내가 택해야 할 어떤 상황이 있는데, 나도 택해지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모델이 초상화를 닮는 게 아니라 초상화가 모델을 닮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인 것 같았다.
-전작인 <벌이 날다>와 <괜찮아, 울지마> 그리고 <포도나무를 베어라>까지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이라고 말했다. 두려움이란 감정에 특별히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과 구원이다.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왜 영화를 하고 있지?, 뭘 얻으려는 거지? 관객에게 무엇을 던져주려는 거야?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곤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관객에게 인간의 아름다운 내면의 향기를 내보이고 싶었다. 한편의 영화를 통해서 관객이 함께 에너지를 발생하면 작은 메시지도 더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선행을 베풀게 되는 경우, 베푸는 자가 더 얻는 게 많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볼 때 두려움과 구원이란 개념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예상치 못하게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장원을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볼 때, 장원이밖에 안 보이더라. 왠지 장원이라면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듯한 신학생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작업을 해보니 장원이는 여러 가지 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진실성이 있는 배우였다. 또한 그런 진실성을 드러내는 틀을 넓게 가지고 있었다. 과감하게 클로즈업을 가지고 가도 흔들리지 않는 면이 있더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의 구절은 어떻게 떠올렸나.
=시나리오를 쓰면서 처음부터 떠오른 구절이었다. 이번 영화의 미장센 컨셉이 나무였다. 자연친화적인 영화이길 바랐다. 가을에 단풍이 질 때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나무가 죽어가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아름다울 때도 고통을 느낄 때가 아닐까? 죽음에 이를 때 가장 진실한 눈동자를 볼 수 있고, 또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지만, 그것을 직면할 때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일반인을 배우로 기용하다가, 이번에는 기성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큰 차이가 있었을 텐데.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멋있는 모습이지만 때로는 그게 영화상으로 드러나면서 리듬을 망가트릴 수도 있다. 일반인들은 생각할 여지를 안주면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그냥 그라운드를 제공하고 마음대로 놀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동네 운동장을 마련 한 것 뿐인데도, 이 사람들은 더 큰 그라운드에서 논 줄 안다. 하지만 기성배우에게는 그럴 수 없지 않나. 기본적으로는 배우들의 상상력과 자연스러움을 가져가려 하되, 조금씩 절제시키는 방향으로 유도하려 했다.
-전작에서는 연출과 촬영, 편집을 혼자서 했다. 스탭이 많아진 것도 큰 변화였을 것 같다.
=그때도 내가 잘나서 한 건 아니었다. 스탭을 최소인원으로 가져가다 보니 나밖에 할 사람이 없었다. 혼자하면서 좋은 점도 있긴 했지만, 사실 짐이 무거울 뿐이었다. 나도 인간인데,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나서 헌팅하러 돌아다니는 게 좋았겠나. (웃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에서 보이는 순수함이 와닿았다. 키아로스타미는 영상으로 은유를 하면서도 붓으로 툭툭 치듯 가볍게 뛰어넘는 게 있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적확하게 표현되는 느낌이 부러웠다. 전작들을 직접 촬영하고자 했던 것도, 남보다 내가 먼저 사물을 바라보고픈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당신의 영화를 국제영화제에 추천한 감독들이기도 하다. 어떤 사연이 있었나.
=1998년 부산영화제 때 마흐말바프가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이었다. 그때 <벌이 날다>는 뉴커런츠 부문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흐말바프가 내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짜고짜 호텔방을 찾아가 내 영화를 봐달라고 졸랐다. (웃음) 한참을 거절하더니, 그럼 딱 30분만 보고 나가겠다고 하더라. 그날 스케줄이 꽉 차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극장에 데려왔는데, 30분이 지나도 나가질 않았다. 가도 괜찮다고 했더니, 귀찮게 하지 말라더라. (웃음) 나중에 마흐말바프의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가 내 영화를 이야기해주었고, 이후 <벌이 날다>가 국제영화제마다 추천되었다. 키아로스타미도 그렇게 가게 된 국제영화제에서 만나게 되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당신의 영화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내가 고려인인 줄 알았다더라. (웃음) 한국 사람이 뭐 하러 그 오지에 갔냐고 묻더라. 물론 키아로스타미나 마흐말바프도 외국에서 영화를 찍곤 한다. 내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내가 왜 그곳까지 갔는지 알고 있다. 키아로스타미가 많은 칭찬을 해주었다. 용기가 대단하다, 내 영화와 비슷한 듯 보여도 표현수단이 더 다채롭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나이가 60은 넘었을 줄 알았다고 하더라. (웃음)
-한서대 연극영화과 교수이기도 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도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무조건 자율이다. 내가 무슨 영화를 가르칠 자격이 있겠나. (웃음) 내가 하는 건 그저 학생들이 원하는 작품을 찍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치열하게 살게 해주고, 학생들이 행복을 느끼면서 영화를 만들도록 해주는 것뿐이다. 출석도 안 부른다. 자기들이 안 오면 그만이지. (웃음) 선생으로서 강조하는 건 딱 2가지다. 일단 카메라부터 사서 갖고 다녀라, 그리고 제발 좀 멋지게 놀아봐라. 카메라 필요하다고 기자재 신청하는 건 피아노과 학생이 학교에서 피아노 빌리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나. 또 영화를 만들려면 연극, 문학, 미술, 무용 등등 봐야 하거나 알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나. 애들한테 주말에 뭐했냐고 물어보면, 영화를 봤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왜 봤냐고 물으면 다들 공부하려는 차원에서 봤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집에서 밥먹고 있는 박지성한테 너 왜 밥먹냐고 물었더니, 체력을 쌓기 위해서 먹었다는 대답을 받는 거랑 똑같은 거다. 그런 태도에서 작품이 나올 리가 없다. 또 다른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한 신부의 말처럼 학생들에게 ‘깃털처럼 가볍게’라는 경구를 강조하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뭐가 있나. 물론 삶은 누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심각하게 가져갈 필요는 없다. 수현의 문제 역시 하느님이 보기엔 그렇게까지 고민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1년 전에는 심각했던 문제도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뭐가 그리도 힘들었을까?’ 하지 않나. 그런 것처럼 수현 역시 하나의 과정에 놓인 것뿐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다를 바 없다. 시나리오를 심각하게 쓴다고 해서 영화가 심각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