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악마의 유년기 트라우마 분석 <한니발 라이징>
2007-02-28
글 : 김도훈
한니발 렉터와 피터 웨버의 팬보다는 공리의 팬을 위한 토머스 해리스의 프로파일링

한니발 렉터는 어떤 유년기를 거쳐 육식동물로 성장했을까. 한니발은 이미 클라리스에게 살인마의 탄생 설화를 설명한 적이 있다. “폭력과 관계된 유년 시절의 정신적 장애를 찾아. 빌리는 살인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학대의 세월을 통해 살인마로 만들어진 거야.”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대답에 대한 영화적 각주로서의 프리퀄이자, 악마의 유년기 트라우마를 분석하려는 뒤늦은 프로파일링이다. 때는 2차대전이 한창인 리투아니아. 소년 한니발과 여동생 미셸은 오두막에 숨어 있던 중 도주하던 독일군 패잔병에게 발각된다. 한겨울의 오두막에 갇혀버린 패잔병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결국 한니발의 여동생을 잡아먹고, 살아남은 한니발(가스파르 울리엘)은 삼촌이 살고 있는 프랑스로 탈출한다. 불행히도 삼촌은 이미 저세상으로 갔지만 숙모 ‘레이디 무라사키’(공리)가 한니발을 거둬들인다. 무라사키에게서 사무라이 법도와 검술을 익히며 의대에 진학한 한니발은 여동생을 소화시킨 위장의 장본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수를 감행하는데, 기묘한 미식 욕구 또한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다.

현재의 한니발 렉터와 연결시키기에는 뜬금없는 내용에서도 짐작이 가듯이,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배트맨 비긴즈>가 아니라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O>에 가까운 영화다. 새로운 탄생 설화를 통해 스스로를 또 다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괴물이 된 과정이 까발려진 괴물은 더이상 괴물이 아니라 멜로드라마의 악당에 불과하다. 사무라이 여인과 2차대전의 카니발리즘으로 인한 꽃미남 한니발의 유년기 트라우마가 구구절절 이어질수록 앤서니 홉킨스가 창조한 한니발의 아우라는 급진적으로 옅어진다. 더욱 불행한 것은 <한니발 라이징>이 재미없는 B급 스릴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피터 웨버 감독은 강박적으로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조율할 줄 알며 프로덕션은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한니발 시리즈의 프리퀄이 아니라 <갈고리를 든 소년>이라는 제목의 스릴러였다면 한니발과 피터 웨버에게 공히 득 되는 게임이었을 것이다. 다만 공리의 팬들이라면 뭐든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헤이안 시대의 고전 <겐지 이야기>로부터 이름을 빌려온 무라사키의 존재는 작가의 일본 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심취를 보여주는 이물이다. 하지만 공리의 결연한 아름다움은 삼키기 힘든 이물감을 소년 한니발의 몽정기적 환상으로 근사하게 변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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