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추억, 역사, 현재를 이어가는 시간여행
2007-03-08
글 : 홍성남 (평론가)
세 파트가 중첩되면서 강렬해지는 사랑 이야기 <쓰리타임즈>

하스미 시게히코는 허우샤오시엔과 오즈 야스지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쓰기를, 과거를 찍는 것을 거부하는 선대의 일본 영화감독과 달리 이 현재의 대만 영화감독은 현재 자체를 상실된 어떤 것으로 본다고 했다. 현재는 지각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리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침윤에 방비상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이것이 다소 미묘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영화가 <카페 뤼미에르>(2005)라면, <호남호녀>(1995)는 그걸 좀더 명백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그리고 미래)는 서로 철저히 분리된 구획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서로 젖어들면서 공존할 수도 있다는 시각.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2005)는 어쩌면 그런 관념을 구조를 통해 재차 구현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이미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한 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쓰리 타임즈>는 그 시간적 배경이 각각 1966년, 1911년, 2005년인 세개의 에피소드를 이어놓은 영화다. 이런 식의 연결이 이뤄진 것에 대해서는 만남, 이별,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어떤 서사적 리듬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만든 영화감독의 궤적을 어렵지 않게 포착해낼 수도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리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또 다른 언급을 다시 거론한다면, <쓰리 타임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펑쿠이에서 온 소년>(1983)(과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을,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각각 <해상화>(1998)와 <밀레니엄 맘보>(2001)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쓰리 타임즈>가 허우샤오시엔이 지금껏 지나온 영화적 여정으로의 초대로 다가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당연히 이건 이 영화에 대해 가능한 수용방식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시간 여행은 단지 과거를 향한 회고의 발걸음만이 아니라 옛 영화를 연상케 하는 현재의 영화를 보면서 현재와 과거의 섞여듦을 경험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렇다고 또 다른 흐름, 즉 <쓰리 타임즈>라는 텍스트 내부를 관통하는 선로를 간과해선 안 된다. 이것은 앞서 지나간 에피소드가 그 다음 에피소드에게 은밀한 터치를 남겨놓고 이 같은 지나간 시간의 엄습을 느낄 것을 조용히 권하는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추억: 회고는 기억하는 자의 현재의 의식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기 전에,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궤적을 분류하기에 대한 것이다. <대만 영화감독들>(컬럼비아대학 출판부)이란 책에서 에밀리 위에위 예는 상업적 영화를 만들던 과거 시절(1975∼82), 새로운 영화의 시기(1983∼88), 국제적 작가로서의 시기(1989∼), 이렇게 세 시대로 허우샤오시엔의 자취를 나눈다. 물론 이것이 모범적인 분류라고 할 순 없지만 이 트립틱(triptych)은 <쓰리 타임즈>의 트립틱과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후자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한 부분을 보여준다. 바로 허우샤오시엔이 아직 어떤 영화적 ‘자의식’을 충분히 갖기 전 로맨틱 멜로드라마라는 대만 영화계의 주요 전통에 몸을 담고 있던 때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는 멜로드라마의 영화감독으로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전의 행보로부터 어떤 ‘단절’을 보여준 게 <펑쿠이에서 온 소년>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허우샤오시엔은 좀더 혁신적인 태도와 섬세한 목소리를 지니되 멜로드라마의 영토를 떠난 건 아니었다. 사랑의 문제에 집중하는 <쓰리 타임즈>는 그 오래된 영토에 대한 방문을 더 명백하게 드러낸 경우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여정에서 <펑쿠이에서 온 소년>은 일종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영화였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에서부터 허우샤오시엔은 인물과 그들이 연루된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인물이, 공간이, 그리고 사건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가 이제 스크린 위에 자전적 이야기를 펼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로 자서전을 찍는다는 것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다른 많은 나라의 뉴웨이브 영화)의 공통적인 중요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도식적이고 인공적인 이야기가 아닌 진솔한 ‘나’의 이야기,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의 이야기, 따라서 대만인의 형성과정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시작 부분에서 보였던 것은 시골 마을의 허름한 당구장이다. <쓰리 타임즈>의 첫 번째 ‘연애의 꿈’ 에피소드는 바로 그와 유사한 장소로 돌아가서 허우샤오시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밑그림이 되었다고 밝힌 1960년대 청춘의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 처지에 있어서 유사한 인물이 주인공인 이것은 그의 연애 이야기에만 집중해서 압축해놓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서로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가끔씩 스크린 밖의 상대를 바라보며 당구 게임을 하는 첸과 메이에게서 은밀한,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애정의 교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후에 메이를 찾아가는 첸의 발걸음과 결국 이뤄진 두 사람의 재회 역시 들뜨지 않은 방식으로 다뤄짐에도 절박함과 기쁨을 차례대로 표출해낸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의 절정인 첸과 메이의 수줍게 잡은 손을 포착한 장면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유유히 흘러가는 것인 수평적 시간에 대립되는 시간, 삶의 기쁨으로 인해 시간의 부동화(不動化)가 일어나는 순간, 다시 말해 수직적 시간의 실례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때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거의 모든 영화들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앞으로 돌아갈 것을 고려하게 만든다. 이 에피소드의 처음에 우리는 첸과 메이가 당구를 치는 순간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옷이나 첸 옆의 동료 같은 사정을 볼 때 아직 ‘연애의 꿈’이란 크레딧이 뜨기 전의 이 순간은 다음의 상응하는 순간과 조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장 ‘손쉬운’ 대답은 이런 유의 것이 될 터이다. 크레딧 이전의 것이든 이후의 것이든 아무튼 한쪽은 다른 쪽의 (넓은 의미의) ‘꿈’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허우샤오시엔은 자전적인 이야기는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상상력이 보태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화감독이다. 회고란 기억하는 자의 현재의 의식을 담은 것이고 그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연애의 꿈’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의 원제인 ‘가장 좋은 시절’(最好的時光)은 다름 아닌 과거를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역사: 시대적 배경과 드라마의 미묘한 결합

‘연애의 꿈’이 당구장의 조명으로부터 시작했듯이 이어지는 ‘자유의 꿈’도 배경이 되는 장소의 불빛으로부터 시작한다.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그곳은 다다오쳉의 한 유곽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그 폐쇄적인 공간에만 한정된 이 에피소드는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허우샤오시엔의 실내극-기녀(妓女) 멜로드라마 <해상화>를 거의 자동적으로 연상케 만든다. 이때 다시 한번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여정을 상기해본다면,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비정성시>(1989), <희몽인생>(1995), <호남호녀>(1995)로 이어지며 대만 역사를 탐구했던 그의 중요한 궤적이 <쓰리 타임즈>에는 빠져 있는 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역사가 개인의 삶에 흘러들며 작용함을 돌출된 게 아닌 미묘한 방식으로 느끼게 만들어주었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역사 시학은 영화사의 가장 독창적이며 동시에 신실한 시도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이러한 시도에 이어 나온 <해상화>는 청대(淸代)의 상하이가 배경이지만 특정한 시공간적 맥락이 탈색된 듯해 거의 추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시공간 안에서 인간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였다. 그런데 바로 이 영화와 묶이는 ‘자유의 꿈’ 에피소드가 그 레퍼런스의 조건을 그대로 되풀이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허우샤오시엔은 ‘자유의 꿈’을 우창봉기가 일어났던 1911년에 배치해놓고는 그 시간대가 던져주는 ‘압력’을 드라마에 미묘하게 융해함으로써 그것에 역사의 감각을 불어넣는다. 그렇다면 ‘자유의 꿈’은 허우샤오시엔의 역사영화들과 <해상화> 사이에 놓인 에피소드로 위치 조정이 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비중을 굳이 따지자면 후자쪽에 조금 가까이 있는 듯하지만).

‘자유의 꿈’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무성영화처럼 자막으로 인물들의 대사를 드러내주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에피소드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의 영화와 유사하게 보이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드라마의 주인공 기녀가 처한 막막한 상황과 공명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유유하게 억압적이랄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 기녀의 사랑과 자유을 향한 갈망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녀를 자주 찾아오는 고객인 창은 반봉건적인 개혁가이자 지식인이다. 끊임없이 ‘계획’에 대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제한적인 것이긴 하더라도 기녀의 동료인 아메이가 유곽을 벗어나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을 주는 그는 순수함과 강직함을 가지고 자신의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의에의 충실함 때문에 그는 바로 가까이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기녀에게는 자유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의 미래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그러고 나서 ‘자유의 꿈’은 이 에피소드의 ‘규칙’을 깨며 그녀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때의 그녀는 가슴속 깊이 묻어놓았던 감정을 아주 힘들여 끌어내놓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켄트 존스는 허우샤오시엔이 존 포드와 공유하는 특징은 공간을 상기하게 만드는 능력에 있다고 쓴 적이 있다.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어떤 공간은 동일한 구도에 반복해서 포착됨으로써 인물만큼이나 친숙한 것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유의 꿈’에서 그 실례는 열려 있는 문을 포착한 숏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그녀를 향해서는 열려 있지 않는 문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녀는 앞의 에피소드인 ‘연애의 꿈’에서의 메이처럼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운명을 지켜보며 묵묵히 앉아 있을 것이다. 이 유곽 안에서 적어도 그녀에게만은 시간은 고여 있는 어떤 것인 듯하다. 그 밖에서는 꿈틀대며 흘러가는 시간, 물길처럼 지날 것 같은 시간, 나중에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게 될 굵직한 시간이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현재: 끊임없이 부유해야하는 시대

기녀에게 속한 정체감(停滯感)을 부정이라도 하듯 영화의 시공간이 2005년의 타이베이로 이동하면 오토바이를 탄 남녀가 다리를 건너는 것이 보인다. 이제 우리는 부유하는 것이 삶의 조건이 된 시대로 온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은 <호남호녀>를 찍을 때부터 현대를 끌어안아야겠다는 절박감을 가졌다고 말한 적 있다. 그리고 1999년에 행한 한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나의 경력에서 대만의 역사는 지나간 일이다. 이제 나는 현재를 영화에 담고 싶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고 <쓰리 타임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청춘의 꿈’은 그 같은 시도의 연장이며 특히 서기가 주연을 맡았던 <밀레니엄 맘보>의 좀더 격한 자매편처럼 보인다. 이 에피소드의 한 장면에서 칭은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고 다른 한쪽 눈으로 첸을 보려 한다. 그런데 그녀의 가리지 않은 오른쪽 눈은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현대를 바라보는 허우샤오시엔 자신의 입장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본 현대란 번쩍거리는 외양 말고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 속 현대인들은 지리를, 사업을, 연인을 끊임없이 바꿔가도록 떠밀려가는 삶을 이어간다. 그들은 자유로운 이동을 행하는 존재들이라 스스로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그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청춘의 꿈’의 마지막 숏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여기서 카메라는 에피소드의 첫숏에서처럼 오토바이를 때론 시야에서 놓치면서 포착하지만 첫숏과는 달리 그걸 탄 남녀를 시야에서 보내버린다. 아무래도 이건 ‘탈주’로 읽힌다. <밀레니엄 맘보>의 마지막에서 비키는 어느샌가 사라져버렸지만 칭과 첸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달아나버린 것이다. 이런 느낌은 이 에피소드가 <밀레니엄 맘보>보다는 순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이동의 ‘수족관 숏’이라 표현할 것을 활용했기 때문에 강화된다. 갇힌 공간 속에다가 육체를 포박하는 이런 숏은 인물을 계속적인 포박 상태에 두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카메라는 칭과 첸을 탈주하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재고해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마지막 숏은 동거하던 여자친구를 잃어버린 칭의 눈물 어린 표정을 담은 숏 다음에 이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사랑과 자유를 바라는 청춘의 덧없는 꿈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쓰리 타임즈>는 구조상의 운율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통해 관객에게 슬픔을 배가하는 영화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세개의 독자적인 파트를 어울리게 하는 영화인 <쓰리 타임즈>는 유사한 형식의 또 다른 걸작인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불안>(1998)을 떠올리게도 한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묘한 곳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어떤 정박점이라고 할 곳이 있어서 세개의 다른 결을 가진 이야기들이 고리로 연결되어 무리없이 이어지면서 차후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그에 비해 허우샤오시엔 영화는 어떤 정박점이 없어 하나의 파트가 다음 파트에 포개지는 식으로 축적되어 종국에 웅장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썼던 많은 평자들이 던졌던 질문, 즉 세개의 파트 가운데 우열이나 취향을 가려내는 것은 이것의 온전한 관람을 위한 그리 적절한 질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각기 다른 파트들이 중첩을 이뤄내며 보는 이의 머릿속에서 강렬함을 더해가는 영화인 것이다(실제로 애정관계이든 감정 표현의 도구로서의 음악이든 소통과 실패를 함께 초래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든 아니면 매번 첸신샨이 연기하는 세 번째 인물과의 관계이든 그 모두는 점차 격화된다). 허우샤오시엔에 대한 좋은 감식안을 가진, 많지 않은 미국의 영화평론가 가운데 하나인 짐 호버먼은 허우샤오시엔이 삶의 모방이라기보다는 삶의 증류에 가깝다고 쓴 적이 있다. 이걸 인용해 말하자면, <쓰리 타임즈>는 세개의 이야기를 중첩시켜 사랑 이야기의 증류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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