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퀸>은 여느 36살 여인의 폭력적 죽음을 다룬 영화들보다 재미있다. 더구나 이번 시즌의 영어권 영화들 중 가장 이국적일 것이다. 피터 모건의 시나리오를 스티븐 프리어스가 감독한 <더 퀸>은 다이애나 스펜서의 치명적인 교통사고 이후로부터 영국 대중의 요구로 성사되는 국장까지, 정신적 충격을 겪는 왕가의 일주일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주제는 기계적 재생산의 시대에 남아 있는 군주제를 다룬다. 영화는 대담하게 셰익스피어(“주군은 동요하며…”)를 인용하고 1997년 ‘현대화’를 외치는 토니 블레어의 압도적인 승리에, 민주주의를 익살스럽게 비웃어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무색게 만들고 시작한다.
새 총리(얼굴이 닮은 마이클 신)는 관습적인 여왕과의 만남을 가까스로 마치고 몇달 뒤 다이애나의 죽음으로 첫 내각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는 사건의 영향을 이해하지만 여왕과 측근들은 그 소식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찰스, 끔찍한 일 아니니?” 엘리자베스는 아들에게 전 부인의 시체를 수습하려는 왕가의 비행기 사용을 불허하고 묻는다. 스코틀랜드의 밸모럴성에서 여름을 나던 윈저가 사람들은 버킹엄궁전 밖 대중이 나타내고 있는 슬픔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의전 절차를 얼버무린다. “사람들의 관심을 덜 끌어들일수록 좋다고 생각해”라고 여왕은 깐깐하게 선언한다. 그녀의 본능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쪽을 택한다. 블레어가 훨씬 더 영리하다. 이 정치가는 다이애나를 ‘국민의 공주’라고 칭하며 왕가의 관례를 어기기까지 한다.
프리어스는 건방진 블레어쪽 인사들과 영 개념없이 밸모럴성에 안주해 있는 왕족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위엄있는 수사슴이 마치 나니아처럼 등장하지만 다이애나의 실제 이미지를 반복해 사용함으로써 영화는 실상과 전설에 역설적이게도 모두 뿌리를 내리고 있다(자료 화면들을 효과적으로 삽입했다. 절정에 사용된 장례식은 매우 잘 편집되어 톰 행크스, 톰 크루즈 등이 참여 군중 가운데 보이고 왕족을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이애나 오빠의 추도사 도중 불편해하는 모습을 마치 TV중계처럼 보여준다).
다이애나의 신성화가 이미지에 의해 이룩된 진정한 승리였다는 점에서 다큐와 드라마의 조화는 <더 퀸>이 갖는 가장 큰 의미가 될 것이다. 파파라치들에게 쫓기다, 세계에서 가장 사진을 많이 찍힌 여자가 앤디 워홀의 ‘참사’ 작품들 중 하나의 소재처럼 죽어버리다니. 일주일 내내 그녀의 추모 영상은 TV를 뒤덮고 즉흥적인 슬픔을 나라 전체로 확산시켜 카메라를 위한 대중의 의례로 바꾸어버린다. 윈저가가 당황하는 것도 별 놀랄 일이 아닌 것이 특히 그들에게 다이애나는 한 사람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더 퀸>의 실제 여왕은 다이애나다. 하지만 필수적으로 곡예영화의 주인공은 헬렌 미렌일 수밖에. 엘리자베스도 이 배우가 보여준 위트를 보여줬을까? 그녀는 혼돈 속에서 보여주는 지성과 시대착오적인 왕가의 스타일을 지녔을까? 여왕을 인간화하려는 시나리오의 시도(지프차가 막힐 때마다 그녀는 “씨부럴”을 외치고 남편에게선 “양배추”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미렌이 보여주는 우아함에 밀리고 만다. 시나리오는 심지어 그녀로 하여금 “요즘 사람들은 글래머와 눈물로 이뤄진 위대한 연기를 원해”라고 말하게 해 자신의 교활한 연기도 인정하게 만든다.
미렌의 연기가 훌륭하게 절제되어 있는 반면 체리 블레어(헬렌 매크로리)가 “공짜만 좋아하는 감정적으로 덜떨어진” 무리라고 묘사한 다른 왕족들은 타고난 웃음거리로 보여진다. 찡그린 얼굴로 마비된 표정만 보여주는 찰스 왕자(알렉스 제닝스)는 불쌍한 버티 우스터(영국 TV배우)처럼 나와 어떻게든 블레어쪽과 연계해 자기에게 돌아올 (실제이건 은유이건) 화살을 어머니에게 향하게 하려고 애쓴다. 불안정한 왕모(실비아 사임스)는 다이애나의 장례식이 자신을 위해 계획한 국장으로 치러진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고 제임스 크롬웰이 최대한의 불쾌감을 보이며 연기한 필립 공은 왕가의 골칫거리다.
필립은 버킹엄 밖 군중을 식민 요새를 둘러싼 줄루족에 비유하고 간섭쟁이 블레어를 “미련퉁이”라고 부른다. 물론 블레어는 이상적인 평민이고 영화의 영웅이다. 여왕과 조국을 위한 책임을 용감하게 이행하기 전 그는 측근들에게 “총리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제발 누가 나서서 이 사람들 좀 구해줘”라고 외친다. 그의 노력 덕에 엘리자베스는 위엄을 잃지 않고 억지로나마 자신의 의무를 깨닫는다. 영화의 끝에 가서 블레어는 이 영화의 제작자들처럼 엘리자베스가 겪는 고통을 오래전 삼촌의 퇴위와 연결해 이해하게 된다. 쇼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처럼 결국 그녀도 인기도에 굴복하고야 만다.
프리어스는 일찍이 <블러디 키즈>에서 보여준 전망을 제대로 실현해보지 못했고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으며 <새미와 로지 잠자리에 들다>만한 야심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더 퀸>은 그의 경력의 종지부일 테고 어쩌면 기사 작위를 가져다줄 영화일지도 모른다. 토니 블레어가 영국 왕조를 살렸건 아니건 간에 프리어스는 그걸 사실처럼 묘사했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 보여준다.
번역 이담형 | 2006.9.26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이며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