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는 1940년 전후의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끈질기게 악의 근원을 찾아낸다. 그는 간혹 그것과 만화적 상상력을 결합하기도 하지만,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에 이르러 프랑코 독재 시기를 통과하는 소녀에게서 선과 악의 대결과 순수의 파괴를 그려내며 <악마의 등뼈>를 넘어 빅토르 에리세와 카를로스 사우라의 작업에 근접한다(델 토로는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망명한 영화인과 교류했고, 스페인 내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더군다나 <벌집의 정령>과 <까마귀 키우기>가 시대를 은유했던 것과 달리 <판의 미로…>는 피와 고통이 난무하는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소녀가 떠난 방에 분필 자국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소녀가 넘나든 세계는 존재하는 곳이 아닌 상상 속의 위안처일 뿐이고, 판타지가 흘린 피가 다시 현실을 물들게 한 결과, 두려움, 사랑, 애정 같은 순수함의 상징조차 탈출구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30여년의 독재를 견뎌야 했으니, 소녀는 죽음으로 그 시간을 피하게 되었음을 위로로 삼아야 할까? HD 마스터를 사용한 DVD는 일부 어두운 장면을 제외하면 경이로운 영상을 보여주며 그에 상응하는 소리 또한 훌륭하다. 두 번째 디스크는 다섯개의 주제별로 제작과정을 살펴보는 메이킹 필름(45분)을 수록했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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