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일자로 단행된 영화사 봄의 인사조치는 얼핏 파격으로 보인다. 1999년 설립한 이래 이 회사를 이끌어왔던 오정완 대표가 ‘제작총괄이사’라고 직함을 바꿨고, 그 대신 대표이사 직함 옆에 오른 것은 조광희라는 이름 석자였기 때문이다. ‘조광희 대표’라는 말의 어감이 이상한 이유는 영화계 인사이더뿐 아니라 그 주변만을 오가는 사람에게도 조광희라는 이름 뒤에는 ‘변호사’라는 직함이 항상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조변’이라 불려온 그는 <하얀방> <범죄의 재구성> 등 상영중지 가처분 사건 상당수를 맡았고, 영화진흥법의 등급보류 조항의 위헌 판결을 받아내는 등 표현의 자유 문제에 앞장서왔으며, 저작권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영화계 안팎의 법률적인 문제를 도맡아 처리해왔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6월 영화사 봄에 제작관리본부장으로 영입되더니 1년도 채 안 돼 대표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대표 자리에 앉기 위해 무슨 변란이라도 일으킨 건 아니다. 조광희 대표의 전진배치는 영화사 봄의 새로운 도약을 고민하던 오정완 전 대표가 영화 제작쪽에 전념하고 조직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기 때문이다.
-대표로 취임하는 소감은.
=무엇보다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과 함께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계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겪는 한계도 있겠지만, 한계가 무엇인지 잘 알면 오히려 그 한계를 쉽게 넘어설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입장이다.
-오정완 대표는 제작총괄이사라는 직함을 달았는데.
=영어로 Chief Film Producer라고 직함을 붙였는데, 말 그대로 프로듀서들을 관리하고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하는 일에 좀더 집중하게 된다.
-그럼 이제 오정완 대표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오 이사다. 그가 대표로 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했고, 본인도 이사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인사의 배경은 무엇인가.
=영화사 봄은 영화회사인데, 그중 ‘영화’는 오정완 이사가, ‘회사’는 내가 책임진다는 개념이다. 오 대표가 대표이사로, 내가 제작관리본부장으로 있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경영에 대한 오 대표의 책임이 좀더 줄고, 나는 대외활동을 좀더 많이 하게 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사는 오정완 이사가 주도한 것으로 아는데, 과정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됐다. 지난해 말 강우석 감독님이 영화사 봄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준 적이 있다.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강 감독님이 나를 대표로 시키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오 이사가 강 감독 말씀이라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지만, 그 말씀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얼마 뒤 내게 공식적으로 대표 이야기를 꺼냈고 논의를 한 결과 올해 봄쯤 그렇게 자리를 바꾸기로 했다.
-현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조직성,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다. 현재 조직이 영화를 만드는 데 최선인지 연구해보려 한다. 또 창조성을 저하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좀더 효율적이고 적합한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 그동안 본부장으로 있으면서 회의 시스템 확립과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효율화 등 회사의 기본기를 다지는 일을 했다. 그리고 영화사 봄은 그동안 1년에 1.5편 정도씩 영화를 만들었는데 적었다는 판단이다. 앞으로는 2년에 4∼5편 정도를 만드는 체제로 가야 한다고 본다. 물론 영화의 질이나 흥행 타율을 유지하는 한에서 말이다. 결국 영화 기획, 개발, 제작 등에서 효율성과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인력도 보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올해 1월 말 <H> <살결> 등을 맡았던 유진옥 프로듀서를 영입했다. 3월에는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지냈던 김영덕 프로듀서가 들어와 해외 업무를 맡게 된다. <필름 2.0> 기자였던 한승희씨는 4월부터 홍보팀을 책임지게 된다. 사실, 그동안 봄은 오정완 이사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회사였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준비 중인 영화는 어떤 것이 있나.
=가장 가까운 것이 <배반의 세레나데>(가제)다. <승부> <뉴스데스크> 같은 단편을 만들었던 허종호 감독이 연출한다. 1960년대 방송사에서 생방송 TV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을 그리는데 4∼5월 중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 외에도 독특한 로맨틱코미디가 하나 있고,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미스터리스릴러도 있다.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차기작과 시나리오 공모를 시작한 두 번째 <정사>도 있다. 이중 올해와 내년 초 개봉할 영화는 2∼3개 정도다. 물론 작품에 대한 좀더 상세한 이야기는 오정완 이사가 해야 할 것이다.
-굉장히 의욕적인 듯한데, 단순한 인사개편만을 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다.
=인사도 시스템 면에서나 작품 면에서나 새로워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사실, 지난해는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한편만을 만들었는데 휴지기라기보단 모색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내부적인 개편과 효율성 제고 작업을 했으니까. 앞서 말한 라인업에서도 보이지만 기획, 개발 또한 충실하게 진행했다.
-CJ와의 파트너 관계가 지난해부터 없어졌는데, 새로운 파트너는 물색 중인가.
=영화 한편씩 투자받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오랫동안 마음을 맞춰서 함께 일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으려 한다. 대외적인 여건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투자사들의 여력이 충분치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지금부터 차분히 추진해보려고 한다.
-대표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파트너 물색인 것 같다.
=우리끼리 하는 농담인데, 그동안 오정완 이사가 ‘자존심 경영’을 해왔다면(웃음) 나는 좀 부드럽게 할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의 최종 소비자는 관객이지만, 그 이전에 감독이나 투자자 또한 다 고객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에도 중점을 둘 것이다. 투자자나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사 봄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
-지난해 6월 봄의 제작본부장으로 영입됐는데,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입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오 이사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것은 오래됐지만 그동안 변호사를 그만둔다는 생각까지 해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2004년 여름부터 1년 동안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연수를 했는데 그때 생각이 좀 바뀐 것 같다. 이전에도 평생 변호사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희박했지만, 미국에서 여유를 갖고 고민을 하다보니 아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지난해 2월인가에 오 이사로부터 구체적이고 진지한 제안을 받았다. 머리 싸매고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렸고 3년 계약으로 이곳에 오게 됐다.
-당시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이를테면 부인이라든가.
=(<4인용 식탁>의 포스터를 가리키며) 저기 적혀 있네. (이 포스터의 메인 카피는 “당신… 미쳤어”다) 아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러더라. 내가 변호사와 결혼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네, 라고. (웃음) 아내와 논의는 함께했지만, 이런 일의 최종 결단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최근에야 들었는데 하도 답답하니까 생전 처음 점까지 보러갔다고 하더라.
-점괘는 어떻게 나왔다나.
=역술인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영화사 다닌다’고 했더니 ‘그런데 사주에 왜 이리 관이 많냐’고 하더란다. 고시나 이런 데 붙는 것을 놓고 ‘관이 많다’고 하는 모양인데, 하여간 의아했나보더라. 그래서 ‘원래는 변호사인데 영화사에 갔다’고 답했더니, ‘관이 많으면 돈이 잘 안 보이는데 돈이 보인다. 자칫 비리 등으로 구설수에 오를 수 있고 감옥까지 갈 수도 있는데 잘 그만뒀다’고 하더란다. (웃음)
-변호사에서 영화사로 옮기면서 경제적인 불이익은 없나.
=변호사 시절에는 월 배당을 받고, 연말이 되면 연 배당을 받았는데, 월 배당만 계산해도 절반 정도로 줄었다. 그래도 큰 불편은 없다. 변호사 때보다는 못하지만 생활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니까. 사실 영화사로 옮긴 초기에는 아내도 심란했나보더라. 점집에 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웃음)
-영화계로 본격 입문하면서 따로 준비를 하기도 했나.
=지난해 봄에 들어와서 심산 시나리오 스쿨을 다녔다. 문자 중독이 있어서 굳이 안 읽어도 되는 시나리오까지 다 읽고 있지만, 사실 시나리오를 보는 건 내 주요 업무가 아니다. 대신 영화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곳에 나갔었다. 김대우 감독의 반에 속했는데, 그의 강의도 좋았지만 작가들이 어떤 자의식으로 글을 쓰는지도 알게 된 것 같다.
-변호사 출신으로 영화 일을 하는 것의 장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영화사도 어쨌든 회사잖나. 변호사라는 직업적 특성상 효율적인 업무처리나 논리적인 프로세스 같은 데 강점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프로젝트별로 모였다 흩어지는 영화의 속성상, 이를 둘러싼 관계는 모두 계약으로 이뤄지지 않나. 이런 법률적인 문제가 비중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능숙하고도 빨리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회사가 기획 중인 법정영화가 있는데 이런 데는 좀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동안 죽 맡아왔던 분야인 저작권이나 명예훼손, 표현의 자유 등의 문제도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는 변호사와 MBA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는데, 한국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한국은 할리우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다만 영화산업이 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결합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인들이 다른 분야와 많이 결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도 영화사에서 일하면서 영화 만들기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답답하진 않을까.
=오정완 이사는 내가 영화에 관여하겠다고 한다면 ‘넌 안 돼’라고 말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한계를 짓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교향곡을 즐기는 것과 만드는 일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내 일을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결국 영화 자체에 깊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내 일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놀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오 이사가 “내가 영화를 하다가 길에서 죽어도…”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그런 각오를 가진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이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다.
-영화계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1996년 영화진흥법을 만들 때부터 관여하게 됐다. 사법연수원 시절 영화서클을 만들어서 활동한 적이 있다. 삭막한 생활이다보니 즐거움을 찾자는 취지에서 고전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보니 영화와 관련된 판례도 서클에서 정리하고 공부도 하게 됐다. 검열이나 음란성과 같은 분야의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독립영화계에 도움도 주었다. 영화진흥법에 참여하게 된 것도 독립영화계의 제안을 받아서였다.
-그 이후로도 죽 영화계와 관련을 맺어왔다.
=연수원을 나와 로펌에 잠시 있다가 나와서 1995년에 민변을 배경으로 활동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건이 많았을 때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영화쪽의 사전심의 문제로 관심이 자연스레 넘어갔다. 한발씩 들어가다보니 영화계와 가까워진 것이었다. 상업영화계와는 1999년 <카라> 제작중지 가처분 신청을 맡으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그 이후 명필름, 봄, 싸이더스 등의 고문변호사를 맡게 됐다. 영화계가 산업화되면서 법률적 지원이 필요했던 것 같다. 2003년인가 2004년인가에는 상영된 한국영화 목록을 보니 내가 관여한 영화가 절반 가까이 되기도 했다. (웃음)
-영화계에서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은 무엇인가. 그리고 괴로움과 답답함은 어떤 것인가.
=법률은 주어진 틀 안에서 맴도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 아닌가. 그런 창조성에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을 내가 직접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답답한 점? 한국 법조계는 문제가 많긴 하지만 분명 어떤 원칙이나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계는 사정이 다르다. 전반적으로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이 정비돼 있지 않다는 생각이다. 계약서도 그런 경우다. 영화를 만드는 게 작은 일이 아니고, 돈도 적은 게 아닌데, 이 정도로 합의해놓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배짱들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웃음) 영화는 가장 창조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만드는 과정은 좀더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런 영화계가 기질상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
=변호사로 지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내가 원래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다. 사실 선천적인 면에서는 영화계가 더 편할 수도 있다. 관료적이고 고답적인 면을 못 견뎌하니까. 변호사 일을 할 때도 법정에 가지 않을 때는 대부분 청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지적도 많이 받았다.
-과거 <씨네21>에 쓴 ‘내 인생의 영화’에서 <정복자 펠레>를 꼽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언제, 어떻게 쌓이게 됐나.
=영화는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굉장히 많이 봤다. 시간이 나면 시내의 개봉영화를 모두 보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도 이대 앞 극장을 자주 다녔고, 프랑스 문화원에 가기도 했다.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
=법대에 들어가니 다들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치상황이 안 좋을 때 아니었나. 2~3학년 때까지 법률가라는 일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고문이 난무했고 동의할 수 없는 재판이 너무 많았다. 사시를 안 볼 생각을 했다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일종의 타협책으로 판검사가 아니라 변호사가 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인권운동에 도움도 줄 수 있다는 차원이었다.
-만약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어떤 영화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따져보면 아무래도 법정영화 아닐까. 법률적 리얼리티 면에서 가장 잘 만든 한국영화는 <바람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제외하면 한국에 아주 멋진 법정영화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한국적 상황에 걸맞은 근사한 법정영화가 탄생했으면 좋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