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뮤지컬 대모의 스크린 입문, <좋지 아니한가>의 문희경
2007-03-07
글 : 최하나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허리띠는 단순히 바지에 걸치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비범한 임자를 만났을 때 허리띠는 유용한 ‘취사도구’가 되기도 한다. 떨어져나간 밥솥 뚜껑을 질끈 동여매 밥상을 차리는 <좋지 아니한가>의 엄마 희경은 억척스런 생활력의 선봉이다. “이게 밥맛이 더 좋아”라는 무심한 말투의 주인공은 그러나, 놀랍게도 뮤지컬 배우 문희경이다. 10년 넘게 <맘마미아> <미녀와 야수> <명성황후> 등 숱한 작품들로 무대에 오른 그녀는 뮤지컬계에서는 이른바 ‘대모’ 격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 본 사람들이 다들 못 알아보겠다고 그래요”라며 눈을 빛내는 문희경은 영화 속 심드렁함과는 정반대로 노래하듯 경쾌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노련한 뮤지컬 배우이자 갓 데뷔한 신인 영화배우, 그 간극만큼이나 출렁이는 감정의 파고에 몸을 실어보자.

꿈에도 몰랐어요. 제가 영화를 하게 될 줄은요.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긴데, 정윤철 감독님이 대학로를 걷다가 제 공연 포스터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떼어가셨던 적이 있대요. <좋지 아니한가>의 엄마 역을 찾는데 문득 제 생각이 나셨나봐요. 스탭들하고 같이 공연을 본 다음에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을 하셨어요. 솔직히 전 별 기대도 안 했어요. 그냥 정윤철 감독님 얼굴 한번 보겠네,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감독님이 한 30분 이야기해보시더니 카메라 테스트도 안 하고 “선배님 믿고 가겠습니다” 하시더라고요. 정말 감동받았죠. 그렇게 시작됐어요.

정말 무식하게 했어요. 제가 영화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어야죠. 또 영화랑 무대는 많이 다르잖아요. 무대는 대사를 또박또박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영화는 정서적인 흐름이 우선이더라고요. 두 가지의 중간 형태는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죠. 근데 왜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뭘 모르고 덤비니까 편한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 보신 어떤 감독님은 그전에 어느 영화에 나오지 않았냐고 자꾸 물어보시더라고요. (웃음)

깜짝 놀랐죠. 공연할 때는 항상 멋있고 세련되게 꾸며서 나오잖아요. 근데 스크린에 비친 제 모습은 어찌나 적나라하던지. (웃음) 하지만 결국 제 숨겨진 모습을 영화를 통해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 한 꺼풀을 벗겨낸 느낌이랄까요. 또 영화 속 희경을 통해 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이 놀랍기도 하고, 가슴이 아련하기도 했어요.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원래 음악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그리움은 빗물처럼>이라는 곡으로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고, 앨범도 냈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저의 재능으로는 버티기가 힘들었고, 가수는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선뜻 뮤지컬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죠. 제가 막 시작할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뮤지컬이 지금처럼 인기가 많지도 않았고, 배우들의 생활도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연기만 하거나 노래만 하는 것보다는 연기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는 뮤지컬에 끌렸어요. 미래를 내다본 선택이었죠. (웃음)

한계를 느꼈어요. <맘마미아> <미녀와 야수>처럼 번역 뮤지컬을 많이 했는데, 모든 것이 다 외국 스탭에 의해 결정되다 보니 나 자신의 정서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밑바닥에서>라는 창작 뮤지컬이었어요. 공연 환경도 개런티도 열악했지만, 저의 숨결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행복했어요. 뒤늦게 하게 된 공부도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죠. 단국대에서 공연예술학 석사를 전공했는데, 딸아이가 돌도 되기 전에 유모차 끌고 입학원서를 내러갔었어요. (웃음) 공연 없는 날 저녁 때 수업 듣고, 또 수업 없을 때 공연하면서 버텼죠. 논문 준비하면서 타이핑 속도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빨라졌어요. (웃음)

어마어마한 결과물을 낳더라고요. 그날그날 충실하게 사는 것이, 그날 찍는 한 장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중에 큰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당장 1년 뒤, 2년 뒤를 꿈꾸기보다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요. 물론 영화는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고, 불러만 주신다면 좋은 작품, 좋은 감독님과 언제든지 작업할 거예요. <좋지 아니한가>에서는 수더분한 엄마 역을 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재즈바의 여주인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제가 뮤지컬 배우니까, 이왕이면 노래가 있는 역이 좋겠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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