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틴 스코시즈가 오스카를 받았다. 40년 가까이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음에도 5전6기 만에 감독상을 탄 것이니 본인이나 지켜본 사람들이나 특별한 감격을 느꼈으리라. 문제는 이번에 감독상과 작품상을 탄 작품이 <디파티드>라는 점. 미국 평단에선 비교적 호평을 받았으나 결코 스코시즈의 대표작이 될 수 없는 영화였기에 수상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개운치가 않다. 물론 스코시즈 말고 누가 받았어야 옳으냐는 것은 좀 애매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택했는데 또 한번 스코시즈를 물먹이긴 곤란했을 테고 <바벨> <더 퀸> <미스 리틀 선샤인> 등 다른 작품상 후보작은 그리 굉장한 영화라는 느낌이 안 든다. 이렇게 뚜렷한 대안이 없을 때 미뤘던 숙제하듯 스코시즈한테 작품상까지 몰아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이번호에 실린 기획기사 ‘아카데미, 오판과 뒷북의 역사’를 보면 그런 과정에서 오스카가 놓친 걸작들이 많은데 그 역사는 흔히 ‘아카데미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기준과 연관이 깊다.
얼핏 아카데미 취향, 하면 떠오르는 것은 <쉰들러 리스트>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미국적 삶을 예찬하는 영화, <마지막 황제>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처럼 이국적 스펙터클이 나오는 영화, <브레이브 하트>나 <글래디에이터>처럼 웅장한 시대극 등이다. 대체로 명백한 장르영화나 전복적인 스타일의 영화는 홀대받았는데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데이비드 린치가 오스카와 인연이 없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보수적인 취향이 잘 드러났던 예로 1941년 작품상 수상결과를 꼽을 수 있다. 그해 작품상은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탔고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 프랭크 카프라의 <존 도우를 만나요>,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설리반의 여행> 등이 외면당했다. 오슨 웰스의 혁신적 영화 <시민 케인>이 각색상 하나만 건진 것도 오늘날 <시민 케인>의 막강한 영향력에 비하면 어처구니없지만 <말타의 매>나 <설리반의 여행> 같은 장르영화 걸작을 무시한 것도 오스카의 특징을 보여준다. 존 포드가 서부극으로 감독상을 탄 적이 없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미국영화의 심장이라 할 이 서부극의 대가는 4번의 감독상을 탔지만 <밀고자>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콰이어트 맨> 4편 모두 서부극이 아니었다.
흑인배우가 자주 연기상을 받고 스페인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가 3개 부문 수상을 하는 등 최근 아카데미 취향에 변화가 있긴 하다. 할리우드영화의 다양성이 커지는 추세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간의 아카데미 수상결과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는데 아카데미 취향의 더딘 진화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반발이 별로 없었다는 게 신기하다. 아카데미를 유일한 기준이라 여긴다면 수상결과를 둘러싼 격한 논쟁이 해마다 반복됐을 텐데 전통적인 아카데미 취향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문득 외부에서 보면 아카데미 취향처럼 공고한 <씨네21> 취향이라는 것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가끔 “우리 영화는 <씨네21> 취향이 아니니까” 혹은 “이 영화는 <씨네21> 취향일 거예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이때의 취향이란 <씨네21>의 다양한 필진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취향일 것이다. 확실히 그게 아카데미 취향이나 대종상 취향, 혹은 칸영화제 취향과는 많이 다르다. 나로선 <씨네21> 취향이 훨씬 낫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도 존중한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는 게 <씨네21>의 취향이기도 하니까.